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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4.19 11:18 수정 : 2017.04.19 11:28

[HERI, 대선 의제를 말하다]-②노동시간 단축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HERI)이 19대 대선 의제를 짚어보는 온라인 기획 ‘HERI, 대선 의제를 말하다’를 연재합니다. 청년·노동·교육 등 각 분야 현장 전문가들이 주요 후보 공약을 포함한 대선 의제를 비판적으로 점검합니다.

19대 대선 후보들께.

<혼술남녀>(tvN)라는 방송을 보신 적 있으신지요. 한때 젊은이들이 즐겨 보았던 드라마였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공시족’을 배경으로 했던 것이 같은 세대의 동질감을 불러일으켰다고도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즐거움 뒤의 어두운 단면을 알게 되었습니다. CJ E&M의 신입 사원이었던 <혼술남녀> 조연출 피디(PD)가 55일간 단 2일만 쉬고, 하루 평균 20시간 가까이 일하다 고통과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극한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방송된 <무한도전>(MBC)에서 하루 22시간 동안 일했다는 일러스트레이터 이야기는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뎌야 할까요.

게티이미지뱅크
5월 9일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후보님들 모두 장미빛 공약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공약들이 실현된다면 당장 덴마크나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가 될 것 같은 ‘환상’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노동 공약은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를 제외하고 주요 후보 모두 비슷합니다. 주요 후보님들 모두 일자리 창출과 맞물려 ‘노동시간 단축’이 주요 공약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나라 노동시간 단축은 본질적으로 일자리 창출이 아니라, 장시간 노동이라는 일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 아니었던가요. 다시 말하면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 노동시간 단축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후보님들 모두 문제의 본질을 잘 못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나라 연간 근로시간은 2113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멕시코(2246시간) 다음으로 깁니다. 선진 유럽과 비교하면 무려 2개월 남짓 더 일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장시간 노동은 노동자의 건강은 물론 개인의 삶을 황폐하게 합니다. 그냥 도시를 거닐다가 매장에 들어가 보면 하루 10시간 남짓 일하는 노동자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1주일에 52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을 규제하려는 법안이 통과되지 못한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1953년 근로기준법이 만들어진 지 55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 노동시간 개정은 단 두 차례에 불과했습니다. 주5일제가 시행되었다고는 하지만 국민 10명 중 2명 정도는 일주일에 6일 이상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도심의 쇼핑몰에 한번 가보면 확인이 가능합니다. 심지어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등은 명절에도 ‘정상영업’을 한다고 합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도 모르겠습니다. 건물 전체가 훤한 도심의 빌딩은 ‘오징어잡이 건물’이 된 지 오래입니다. 밤 10시가 넘어서도 야근하는 사람들 때문에 빌딩 절반 이상이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빚댄 말입니다.

이뿐인가요. 직장인들에게 15일의 연차휴가는 정규직에게만 가능한 조항입니다. 비정규직에게는 남의 일이죠. 눈치 안 보고 휴가갈 수 있도록 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지도 벌써 1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1년 365일 직장과 집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오가면서 고작 3~4일간의 여름휴가라도 보낼 수 있으면 다행입니다. 그것마저 주말을 끼고 사용하는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또 국가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장시간 노동체제에 익숙한 우리는 막상 1주일 휴가를 준다면 무엇을 할지부터 고민해야 합니다.

유엔 산하 전문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의 권고조항에는 입사 6개월 이후부터 휴가를 권고하고 있고, 최소 휴가제(20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 공약을 제외하면 다른 후보들은 ‘노동시간 단축’ 첫 단추부터 잘 못 끼웠습니다. 첫 단추를 잘 못 끼웠으니 그 단추를 풀고 다시 끼워야겠죠. 우리나라 ‘장시간 노동’ 문제는 무엇이고, 그 문제 해결을 위한 쟁점은 무엇이며, 정부의 역할은 무엇인지 고민하시면 좋겠습니다.

기업은 그간 경직된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최소 인력으로 운영해왔습니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새로운 인력 1명을 채용하는 것보다 초과근무 수당을 지급하는 것이 더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이죠. 개별 노동자들은 워낙 낮은 임금과 부실한 사회 안전망 탓에 연장근무나 휴일근무 수당으로 소득을 보전받지 않으면 당장 가계에 문제가 되는 상황입니다. 이런 사회적 구조는 지난 55년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만들어 놓은 장시간 노동체제입니다.

134일간의 촛불의 힘으로 우리는 새로운 사회를 맞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런 사회에 대선 후보님들은 그 답을 해주어야 합니다. 노동시간 단축이 일자리 창출이나 ‘52시간 상한제’에 국한되면 의미가 없습니다. 장시간 노동을 줄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5일제를 전면 시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운수·금융·영화제작·통신·교육연구조사·광고·의료 및 청소업 등 1주일 52시간 근무가 가능하도록 한 특례 업종부터 줄여야 합니다. 또한 유럽연합(EU) 기준에 맞춰 1주 근로시간 상한을 48시간으로 해야 합니다. 연차휴가도 입사 6개월부터 쓸 수 있도록 하고, 1년 이상 근무자는 20일 이상 부여해야 합니다.

23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서열린 ‘서울시 노동시간 단축 협약식’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셋째)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협약서에 서명한 뒤 손을 맞잡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시는 이미 노동시간 단축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간 추상적 수준에서 논의되었던 의제를 공공부문에서 첫 발을 디딘 겁니다. 서울시는 OECD 평균 수준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기 추진된 ‘시간선택제’와 같은 짝퉁 노동시간 단축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제도와 정책입니다.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는 사회경제적 요인이 있다면 과감하게 국민과 토론하고 개선하면 좋겠습니다. 고용정책기본법에 장시간근로 유발부담금을 신설하고, 노동시간 단축 사업장 임금보전 등을 통한 제도개선부터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차기 정부는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하루 8시간 근무만이 아니라, 6시간이나 7시간도 정상으로 인식되는 근무형태와 조건을 모색해야 합니다. 직장인들에게 2주 정도의 휴가는 부여 받을 권리가 있어야 합니다. 이젠 국민 누구나 일상을 털어 버리고 홀가분하게 여행 갈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필요합니다. 1630만명의 촛불 시민과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런 사회를 기대할 것입니다. 장시간 노동을 줄이겠다고요? 그럼 일자리 창출이 아니라,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는지를 고민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대선 후보님들의 답을 기다리겠습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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