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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13 18:34 수정 : 2017.03.13 18:59

윤나리
변호사·전 판사

며칠 전 대한변호사협회로부터 변호사 등록이 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말 한마디 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던 공직에서 벗어나 40대부터는 자유로운 시민으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올해 2월20일 12년간 입고 있던 법복을 벗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변호사 업무를 시작하지 않고 있다. 그동안 혹사당했던 머리도 식힐 겸 여행도 다니고 만화방에서 빈둥거리며 잠시나마 꿈에도 그리던 무위도식의 삶을 살아보리라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획은 어그러져 버렸다. 자연스레 판사로서의 정체성을 벗고 변호사로 탈바꿈하기도 전에 사건이 터진 것이다.

‘법원행정처는 올해 2월 법원행정처로 발령 난 판사에게 법원 내 최대 학회인 국제인권법연구회의 공동학술대회를 저지, 축소하라는 지시를 했다. 그런데 해당 판사가 부당한 지시라며 이를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하자 기존의 인사명령을 취소하고 원래 법원으로 복귀시키는 인사명령을 11일 만에 다시 했다’는 기사가 난 것이다. 위 학술대회에서는 전국 판사들을 대상으로 한 사법제도 개혁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이재용 삼성 부회장 영장 기각 사건 등 사법 불신을 초래하는 재판의 구조적 원인으로 대법원장에게만 권한이 집중되어 있는 법관인사제도를 지목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이루어진 설문조사였다.

이 ‘법원발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기사 이후 판사들의 동요가 심해지자, 법원행정처장은 판사들에게 ‘학회와 관련된 위법, 부당한 지시를 한 바 없다. 해당 판사가 법원행정처 근무를 원하지 않아 일선 법원으로 복귀시키는 인사명령을 다시 한 것이다. 해당 판사의 뜻에 따라 그 사정은 자세히 밝힐 수 없다’고 해명했다. 그리고 대법원의 공보판사들 역시 이 지침에 따라 최초의 보도는 사실관계 확인을 거치지 않은 허위라는 취지로 각 언론사들을 설득해 추가 기사가 나가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한 번 이루어진 인사명령이 11일 만에 뒤집히는 일은 20년 넘게 근무한 판사들도 처음 보는 일이라며 입을 모아 말한다. 휴직으로 인한 복귀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인사 시기가 지나서 인사가 이루어지는 일 자체를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또한 판사 생활을 1년이라도 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법원행정처가 당사자가 보직이나 발령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번 있었던 인사명령을 11일 만에 취소해주는 인간적인 배려를 하는 곳이 절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나를 포함한 여러 판사들은 2월 인사명령 이후 해당 판사로부터 법원행정처에 가서 열심히 일해보겠다는 포부를 직접 듣지 않았던가.

이러한 이유로, 마치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때 박근혜 대통령의 상식에 어긋난 해명이 오히려 시민들의 분노와 의혹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법원행정처장의 해명에 오히려 판사들이 분노와 의혹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공개적인 의사 표현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판사들은 부글부글 끓고 있는 마음을 속으로만 삭이고 있다. 그래서 이제 막 마음껏 말할 자유를 얻게 된 내가 공개적으로 분노를 표하는 것이다.

법원의 진짜 주인인 시민으로서 당분간은 이 사태를 지켜볼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책임자들이 법원에 계속 남아 다시 법대에 앉는 날이 온다면 변호사로서의 내 첫 사건은 해당 책임자들을 직권남용으로 고발하는 일이 될 것이다.

간절히 바란다. 그런 상황까지 가지 않기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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