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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06 18:35 수정 : 2017.03.06 19:10

박은지
독일 교민

조국을 떠나면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특히 작년 한 해는 전국이 들썩할 정도로 전 국민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들이 많았으니, 여기 독일 땅에서도 자연스레 한국의 소식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나 또한 마음속으로 촛불을 들며 광장에 나가 있는 친구들과 오빠네 가족들을 응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하던 중 자연스레 대통령의 비뚤어진 정치 이야기가 나왔다.

“글쎄, 엄마는 잘 모르겠어.” 대통령과 비선 실세의 판타지 같은 이야기에 함께 분노해주기를 바라던 나는 기운이 쭉 빠졌다. “대통령이 다 잘못한 것은 아니라던데….” 아니, 이럴 수가. 우리 엄마는 텔레비전과 신문도 안 보고 사신다는 말인가. “엄마 요즘 뉴스 안 보세요? 온 세상이 난리인데, 엄마는 너무 평온한 거 아니야?”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엄마가 보는 뉴스에서는 대통령이 피해자라고 하더라고.” 아뿔싸.

케이블 채널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 엄마 아빠가 보는 티브이 채널은 <한국방송>(KBS), <문화방송>(MBC) 그리고 아주 가끔 <에스비에스>(SBS). 포항에서 신문 광고 일을 하시는 외삼촌이 가져다주시는 신문은 <조선일보>, <중앙일보> 그리고 <동아일보>. 엄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극도로 편향된 일부의 정보만 접하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 엄마는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공식이 굳건하던 경상도의 한가운데서 ‘그 사람은 좋은 분’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분이다. 나는 명절 식탁에 둘러앉아 이런 우리 엄마에게 훈계를 펼치던 큰아버지와 삼촌들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럼에도 의견을 굽히지 않던 엄마가 멋져 보였던 나였기에 박근혜 대통령을 옹호하는 엄마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총격에 어머니도, 아버지도 잃고, 평범치 않은 가정에 태어나 결혼조차 하지 못한 대통령에게 엄마는 강한 연민과 함께, 박정희 시대를 살아온 국민으로서의 마음속 빚을 지고 있다고 하셨다.

나는 전적으로 공감할 수는 없지만, 왜 한국의 수많은 어른들이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았는지 조금이나마 이해되는 듯했다.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한 사람, 어릴 적부터 정치를 보고 배웠으니 누구보다 나라를 잘 다스릴 것이라는 생각에서 박근혜를 믿으셨다는 우리 엄마. 이런 엄마의 기억 속에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여 싸운 민주혁명사는 없는 듯했다. 할머니의 작은 가게에서 하루 종일 허리도 못 펴고 일하던 엄마의 젊은 시절에, 티브이에도, 신문에도 나오지 않던 대학생들의 저항 운동이 포항의 작은 동네에까지 전해질 리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찾은 내 고향 포항에서의 첫 아침, 길거리에 울려 퍼지던 태극기 사단의 스피커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차에 확성기를 달고, ‘태극기여, 일어나라’는 식의 전투적 음성이 동네를 가득 울렸다. “세상에나.” 엄마가 전화로 들려주던 박근혜의 극성팬들을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나는 카카오톡으로 전해지는 선정적인 가짜 뉴스에 노출된 엄마를 위해, 엄마가 들려주는 일명 ‘찌라시’의 내용에 반하는 <제이티비시>(JTBC)나 <한겨레> 등의 뉴스를 보내드렸다. 어떻게 가짜 뉴스들이 생성되고 퍼지는지, 혹은 그 뉴스 속의 이야기가 왜 거짓인지를 밝혀내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내가 보내드리는 정보 또한 홍수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은지야, 엄마는 이제 무슨 말이 진실인지 모르겠어. 아무것도 못 믿겠어.”

요즘 엄마의 식탁 위에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된 책들이 올려져 있다. 지난 4년 동안 누군가의 힘에 의해 조종된 정보만 받아들이던 엄마가 지식의 편식을 이겨내고자 혼자 힘겨운 싸움을 하고 계신 것이다.

나는 엄마가 나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문에서 보는 수많은 어르신들의 행동 또한 잘못됐다고 단정짓고 싶지는 않다. 그저 편향된 정보 속에서 굳어져 버린 그분들의 비뚤어진 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우리 엄마만큼은 조금 더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그 안에서 엄마의 생각을 스스로 찾아나가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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