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버넌스 연구자 미국 모하비 사막에 있는 포트 어윈이라는 훈련소는 미군의 해외 파병지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각종 세트장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미국의 대형 영화사가 지은 시설이다. 파병 전 병사들은 각종 전장의 시나리오에 맞추어 마치 영화 촬영장을 방불케 하듯 생생한 현장감 속에서 훈련을 받는다. 예를 들면 이라크에 파병 전, 병사들은 히잡을 두른 임신한 여인의 배가 자살 폭탄으로 감겨 있다는 시나리오에 따라 그들을 사살하는 훈련을 한다. 현장의 화약 연기, 총기 소리 등은 영화사 특수효과팀이 만들어 낸다. 여인의 몸에 부착된 센서로 명중 여부가 인식되면 그 여인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며 죽는 연기를 한다. 아마도 미국 유학 시절 때에 들은 조사보고서의 내용인 것으로 기억한다. 훈련에 참가한 미군을 관찰하니 병사들은 모의훈련 상황임을 알면서도 그 여인에 총을 쏠 때마다 움찔움찔 주저한다. 연기하는 배우와 특수효과팀이 만들어낸 진짜 같은 가짜의 효과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라크 전장에서의 병사들은 달랐다. 민간인들에게도 테러범으로 의심되면 총을 겨누고 사살하는 데 아무 주저함이 없어진다. 생포한 포로들을 마치 짐승 다루듯 발로 짓밟고 활짝 웃어가며 이를 기념하듯 촬영도 한다. 마치 게임처럼. 포트 어윈에서의 훈련은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진짜 전쟁을 마치 가상의 게임처럼 수행한다. “태극기에 깔려 죽고” “시가전과 피로 물든 아스팔트” “암살단이 모집되고, 군대가 일어나는,” 2017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곤 믿기 어려운 마치 가짜 같은 언어들의 실재도 그런 맥락과 동일한 것은 아닐까. ‘민주주의+진보=종북좌파’라는 가상의 공식은 보수, 기득권 세력들에겐 그들만의 이심전심의 영역에 숨겨져 왔다. 적어도 탄핵정국의 “가짜 뉴스”들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절박함 때문일 것이다. 민주주의 촛불의 빛이 그들의 권력공간을 환히 비추기 시작하자 그동안 은밀히 그들이 공유해왔던 가짜의 언어들이 실재의 세상으로 대놓고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탄핵과 촛불이 종북좌파로 치환되었다. 6·25의 아픈 상처와 기억의 트라우마가 그 증오의 ‘훈련소’였음을 보듬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래도 촛불시민, 특검 그리고 헌법재판소에 대한 ‘백색폭력’의 소환이라는 가짜 같은 진짜 현실에 참담하다. 기억과 상처로 왜곡된 현실이 그들의 실존 조건이 아니라면 이 광기의 언어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4·3과 5·18의 그때, 그 언어들이 지금도 살아서 꿈틀대는 이 현실, 역사의 퇴행이다. 폭력에 대한 욕망을 극복해온 인류 역사의 보편적 진보에 대한 반동이다. 그 어려운 일을 그들이 지금 해내고 있다. 촛불은 꺼진다. 그렇다고 태극기, 성조기, 백색폭력의 바람에는 꺼지지 않는다. 대통령 탄핵의 시민 의지가 관철되는 날, 바로 탄핵의 봄날 꺼질 것이다. 하지만 ‘태극기 단상’에 낯익은 자들이 오를수록 가짜와 거짓에 진짜 같은 리얼리티는 증폭될 것이고, 잠재된 폭력에 대한 욕망을 더욱 현실로 불러낼 것이다. 극우, 백색폭력의 생명력, 참 질기고 질기다. ‘태극기 단상’의 낯익은 자들에게서 그 모습을 본다. 권력, 기득권, 극우, 군복 등의 단어만 벗겨내면 보통의 아버지이며 할아버지들이다. 잊고 지냈던 거대 악이 그들에게 이토록 ‘평범’하게 존재해 왔다는 사실에 경악스럽다. 마치 아렌트의 성찰, “악의 평범함”처럼. 하지만 백색폭력에 대한 욕망을 소환시키는 그들의 광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2017년 대한민국에서 가짜 같지만 진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왜냐면 |
[왜냐면] 가짜뉴스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 장백진 |
장백진
거버넌스 연구자 미국 모하비 사막에 있는 포트 어윈이라는 훈련소는 미군의 해외 파병지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각종 세트장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미국의 대형 영화사가 지은 시설이다. 파병 전 병사들은 각종 전장의 시나리오에 맞추어 마치 영화 촬영장을 방불케 하듯 생생한 현장감 속에서 훈련을 받는다. 예를 들면 이라크에 파병 전, 병사들은 히잡을 두른 임신한 여인의 배가 자살 폭탄으로 감겨 있다는 시나리오에 따라 그들을 사살하는 훈련을 한다. 현장의 화약 연기, 총기 소리 등은 영화사 특수효과팀이 만들어 낸다. 여인의 몸에 부착된 센서로 명중 여부가 인식되면 그 여인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며 죽는 연기를 한다. 아마도 미국 유학 시절 때에 들은 조사보고서의 내용인 것으로 기억한다. 훈련에 참가한 미군을 관찰하니 병사들은 모의훈련 상황임을 알면서도 그 여인에 총을 쏠 때마다 움찔움찔 주저한다. 연기하는 배우와 특수효과팀이 만들어낸 진짜 같은 가짜의 효과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라크 전장에서의 병사들은 달랐다. 민간인들에게도 테러범으로 의심되면 총을 겨누고 사살하는 데 아무 주저함이 없어진다. 생포한 포로들을 마치 짐승 다루듯 발로 짓밟고 활짝 웃어가며 이를 기념하듯 촬영도 한다. 마치 게임처럼. 포트 어윈에서의 훈련은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진짜 전쟁을 마치 가상의 게임처럼 수행한다. “태극기에 깔려 죽고” “시가전과 피로 물든 아스팔트” “암살단이 모집되고, 군대가 일어나는,” 2017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곤 믿기 어려운 마치 가짜 같은 언어들의 실재도 그런 맥락과 동일한 것은 아닐까. ‘민주주의+진보=종북좌파’라는 가상의 공식은 보수, 기득권 세력들에겐 그들만의 이심전심의 영역에 숨겨져 왔다. 적어도 탄핵정국의 “가짜 뉴스”들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절박함 때문일 것이다. 민주주의 촛불의 빛이 그들의 권력공간을 환히 비추기 시작하자 그동안 은밀히 그들이 공유해왔던 가짜의 언어들이 실재의 세상으로 대놓고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탄핵과 촛불이 종북좌파로 치환되었다. 6·25의 아픈 상처와 기억의 트라우마가 그 증오의 ‘훈련소’였음을 보듬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래도 촛불시민, 특검 그리고 헌법재판소에 대한 ‘백색폭력’의 소환이라는 가짜 같은 진짜 현실에 참담하다. 기억과 상처로 왜곡된 현실이 그들의 실존 조건이 아니라면 이 광기의 언어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4·3과 5·18의 그때, 그 언어들이 지금도 살아서 꿈틀대는 이 현실, 역사의 퇴행이다. 폭력에 대한 욕망을 극복해온 인류 역사의 보편적 진보에 대한 반동이다. 그 어려운 일을 그들이 지금 해내고 있다. 촛불은 꺼진다. 그렇다고 태극기, 성조기, 백색폭력의 바람에는 꺼지지 않는다. 대통령 탄핵의 시민 의지가 관철되는 날, 바로 탄핵의 봄날 꺼질 것이다. 하지만 ‘태극기 단상’에 낯익은 자들이 오를수록 가짜와 거짓에 진짜 같은 리얼리티는 증폭될 것이고, 잠재된 폭력에 대한 욕망을 더욱 현실로 불러낼 것이다. 극우, 백색폭력의 생명력, 참 질기고 질기다. ‘태극기 단상’의 낯익은 자들에게서 그 모습을 본다. 권력, 기득권, 극우, 군복 등의 단어만 벗겨내면 보통의 아버지이며 할아버지들이다. 잊고 지냈던 거대 악이 그들에게 이토록 ‘평범’하게 존재해 왔다는 사실에 경악스럽다. 마치 아렌트의 성찰, “악의 평범함”처럼. 하지만 백색폭력에 대한 욕망을 소환시키는 그들의 광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2017년 대한민국에서 가짜 같지만 진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거버넌스 연구자 미국 모하비 사막에 있는 포트 어윈이라는 훈련소는 미군의 해외 파병지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각종 세트장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미국의 대형 영화사가 지은 시설이다. 파병 전 병사들은 각종 전장의 시나리오에 맞추어 마치 영화 촬영장을 방불케 하듯 생생한 현장감 속에서 훈련을 받는다. 예를 들면 이라크에 파병 전, 병사들은 히잡을 두른 임신한 여인의 배가 자살 폭탄으로 감겨 있다는 시나리오에 따라 그들을 사살하는 훈련을 한다. 현장의 화약 연기, 총기 소리 등은 영화사 특수효과팀이 만들어 낸다. 여인의 몸에 부착된 센서로 명중 여부가 인식되면 그 여인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며 죽는 연기를 한다. 아마도 미국 유학 시절 때에 들은 조사보고서의 내용인 것으로 기억한다. 훈련에 참가한 미군을 관찰하니 병사들은 모의훈련 상황임을 알면서도 그 여인에 총을 쏠 때마다 움찔움찔 주저한다. 연기하는 배우와 특수효과팀이 만들어낸 진짜 같은 가짜의 효과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라크 전장에서의 병사들은 달랐다. 민간인들에게도 테러범으로 의심되면 총을 겨누고 사살하는 데 아무 주저함이 없어진다. 생포한 포로들을 마치 짐승 다루듯 발로 짓밟고 활짝 웃어가며 이를 기념하듯 촬영도 한다. 마치 게임처럼. 포트 어윈에서의 훈련은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진짜 전쟁을 마치 가상의 게임처럼 수행한다. “태극기에 깔려 죽고” “시가전과 피로 물든 아스팔트” “암살단이 모집되고, 군대가 일어나는,” 2017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곤 믿기 어려운 마치 가짜 같은 언어들의 실재도 그런 맥락과 동일한 것은 아닐까. ‘민주주의+진보=종북좌파’라는 가상의 공식은 보수, 기득권 세력들에겐 그들만의 이심전심의 영역에 숨겨져 왔다. 적어도 탄핵정국의 “가짜 뉴스”들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절박함 때문일 것이다. 민주주의 촛불의 빛이 그들의 권력공간을 환히 비추기 시작하자 그동안 은밀히 그들이 공유해왔던 가짜의 언어들이 실재의 세상으로 대놓고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탄핵과 촛불이 종북좌파로 치환되었다. 6·25의 아픈 상처와 기억의 트라우마가 그 증오의 ‘훈련소’였음을 보듬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래도 촛불시민, 특검 그리고 헌법재판소에 대한 ‘백색폭력’의 소환이라는 가짜 같은 진짜 현실에 참담하다. 기억과 상처로 왜곡된 현실이 그들의 실존 조건이 아니라면 이 광기의 언어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4·3과 5·18의 그때, 그 언어들이 지금도 살아서 꿈틀대는 이 현실, 역사의 퇴행이다. 폭력에 대한 욕망을 극복해온 인류 역사의 보편적 진보에 대한 반동이다. 그 어려운 일을 그들이 지금 해내고 있다. 촛불은 꺼진다. 그렇다고 태극기, 성조기, 백색폭력의 바람에는 꺼지지 않는다. 대통령 탄핵의 시민 의지가 관철되는 날, 바로 탄핵의 봄날 꺼질 것이다. 하지만 ‘태극기 단상’에 낯익은 자들이 오를수록 가짜와 거짓에 진짜 같은 리얼리티는 증폭될 것이고, 잠재된 폭력에 대한 욕망을 더욱 현실로 불러낼 것이다. 극우, 백색폭력의 생명력, 참 질기고 질기다. ‘태극기 단상’의 낯익은 자들에게서 그 모습을 본다. 권력, 기득권, 극우, 군복 등의 단어만 벗겨내면 보통의 아버지이며 할아버지들이다. 잊고 지냈던 거대 악이 그들에게 이토록 ‘평범’하게 존재해 왔다는 사실에 경악스럽다. 마치 아렌트의 성찰, “악의 평범함”처럼. 하지만 백색폭력에 대한 욕망을 소환시키는 그들의 광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2017년 대한민국에서 가짜 같지만 진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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