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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2.20 18:32 수정 : 2017.02.20 19:00

방귀희
㈔한국장애예술인협회 회장

나는 적어도 3년 전까지만 해도 노력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중증 장애인인 나는 고등학교 때 체육점수 40점을 받은 적이 몇 번 있었다. 60점을 주니 학부형들이 ‘왜 체육 수업을 받지 않은 학생에게 60점씩이나 주냐’고 항의를 하여 40점이 된 것이다. 그때 체육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안하구나. 성적을 매기면서 선생님도 마음이 아팠다. 40점에 낙담하지 마라. 네가 100점짜리 학생인 것은 다 안다.” 만약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해주지 않으셨다면 나는 선생님을 원망하며 미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유를 설명하며 사과를 했기에 수용이 가능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바로 방송작가로 일했다. 대학 수석 졸업으로 방송에 출연하였다가 발견한 직업이었으니 그 역시 노력의 결과였다. 32년 동안의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 신념이 지켜졌다. 방송 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면 평가가 좋았다. 그래서 항상 노력하며 공공성과 공익을 우선의 가치로 여겼다. 그 결과 장애인에게 쉽게 오지 않는 기회들이 찾아왔다. 물론 실패가 더 많았지만 그때는 그 원인이 나한테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희망을 잃지 않고 꾸준히 도전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신념이 무참히 깨지는 사건이 생겼다. 나의 전문성과 경력으로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기회들이 비웃기라도 하듯이 나를 비켜갔다. 나중에는 모든 기회를 박탈당하였다. 큰 기회는 ‘대통령이 싫어하는 인물’이라서, 작은 기회는 ‘장관이 싫어하는 인물’이라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에서였다.

여고 시절 체육선생님처럼 이유를 설명해주었으면 억울하지 않았을 텐데, 체육선생님처럼 미안하다며 진심을 보여주었으면 분노심을 갖지 않았을 텐데. 상대방이 입을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낄낄거리며 ‘넌 무조건 안 된다’는 식으로 모욕을 당했을 때는 배신감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그 이유가 바로 블랙리스트였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블랙리스트에 적힌 단 몇 줄로 수십년 동안 쌓아온 그 사람의 능력을 사장시키는 행위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탄압하던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약자의 약함을 이용해 마음껏 짓밟고 있는 현실을 바로잡지 않으면 약자 중의 약자인 장애인은 평생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여 개인적인 피해는 차치하고 1만 장애 예술인, 더 나아가 450만 장애인의 생존권을 위하여 장애인 문화예술에 대한 블랙리스트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기에 블랙리스트 당사자로서 공개 청원을 한다.

블랙리스트를 생산하고 시행한 문화체육관광부는 전직 장차관 구속으로 면죄부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장관 대행이 머리 숙여 사과를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블랙리스트에 대한 의혹을 누가 들어도 납득할 수 있도록 해명하고, 잘못은 인정하며 양해를 구하는 진정어린 소통과 함께 피해와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장애 예술인들은 장애인 체육 예산의 10%에 머물고 있는 장애인 문화예술 예산을 확대하고, 우수한 장애인 선수들이 매월 경기력 향상 연금을 받듯이 재능 있는 장애 예술인들에게 그에 준하는 창작지원금을 지급할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 ‘장애예술인지원법’을 제정하고 문화체육관광부에 장애인 문화예술 전담 부서를 설치해 장애인들의 문화예술 활동을 안정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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