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7.02.20 18:30 수정 : 2017.02.20 19:01

박찬성
변호사, 서울대 인권센터 전문위원

기가 찬다. ‘근혜순실’의 탄핵 지연 막장드라마에 모두의 정신이 쏠려 있는 사이,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이 또 하나 벌어지고 있었다니. “#문화계_성폭력”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퍼레이드 말이다. 피해자들에게 으름장을 놓고 협박까지 했다니 정말 쓴웃음만 나온다.

어쩌면 이토록 예상 가능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걸까. 하지만 기사를 읽으면서 몇 가지 궁금증도 생겼다. 가해자들은 애초에 사과는 왜 했던 걸까. ‘얼른 이 순간만 모면하면 금세 잊히겠거니’ 하는 얄팍한 생각이었던 걸까. 한 가지 더. 가해자들이 이미 사과까지 했다고 하니, ‘뻔뻔하게도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으로 피해자들을 고소한 건 설마 아니겠지?’라는 의문.

누구나 형사 피해를 입었다면 고소할 자유가 있다. 그렇다. 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권리인데 이를 왜 행사할 수 없겠는가. 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해 보자. 박근혜도 최순실도 진술을 거부할 권리를 행사할 수는 있다. 또 무죄로 인정된 간첩조작 사건에 대한 배상청구소송에서 국가가 패소했을 때, 국가는 이에 대해서 상소할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법이 부여하는 권리라고 해서 이를 행사하는 것이 정의와 형평, 그리고 공동체의 관점에서 언제나 반드시 바람직하거나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현행법은 허위사실뿐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적시한 경우에도 타인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다고 보아서 처벌 대상의 하나로 삼는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입법례를 보면, 우리와는 달리 허위사실을 적시한 경우에 한해서만 명예훼손으로 처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쨌건 아직까지 우리 법은 사실이든 허위사실이든 가리지 않고 명예훼손으로 다룬다. 그렇기 때문에 작금의 사태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역공과 분란에 피해자들이 또 한 번 고통을 겪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한다. 성폭력 문제제기는 계속되어야 옳으나, 좀더 두터운 피해자 보호를 위해서 그 방식에 관한 섬세한 고민도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본다. 이번 사안에서 정말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당한 문제제기 이외에 행여 가해자에 대한 인신모독적 또는 조롱성 발언을 유포하는 것 등은 또 다른 인권침해 소지가 있으니만큼 피해자로서도 삼가야 할 것이다. 분노에는 충분히 공감하나, 분노에 따른 모든 행동이 용인되는 것은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피해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어떠한 경우에도 좌절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고. 저들이 무슨 수를 쓰건 우리가 당신들과 함께하며 연대하겠노라고. 가해자로 지목된 자들-사실, 그들이 누구인지조차 별로 알고 싶지도 않지만-에게도 말하고 싶다. ‘나’의 권리와 명예는 그렇게 끔찍이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왜 타인의 권리는 그토록 끔찍하게 짓밟았던 거냐고. 제발 부끄러운 줄 알라고.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