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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1.02 18:20 수정 : 2017.01.02 19:28

박종서
평택샬롬나비 문화예술위원장, 박사

만약 누군가 “우리 한번 같이 벗어볼까, 누가 더 더러운지…?”라는 공격적인 제안을 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거부할 것이다. 비록 거짓일지라도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 환상이 필요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발가벗기고 파헤친 프로이트가 환영받지 못했던 이유도 그가 환상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인간이 아무리 자신의 치부를 위장하고 각색한다 할지라도 결국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다른 ‘부작용’으로 나타났던 임상경험 때문이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정치적 갈등도 좌우 이데올로기라는 환상이 만들어낸 부작용은 아닌지 검토해 보아야 한다.

과거 반유신체제 활동을 하다가 요즘 반좌파 운동을 하는 인사들의 글 요지는 “이제 먹고살 만하니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잊었느냐? 어떻게 해서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지 벌써 잊었는가? 우리나라에서 멸공사상보다 앞서는 것은 있을 수 있는가? 광화문 광장에 인공기가 휘날리는 것을 보아야 정신을 차리겠는가?”라는 것들이다. 이 글의 행간에서 종종 우리는 “봐라! 내가 반정부 운동을 하다가 감옥까지 갔다 온 사람이 아니냐? 오죽하면 반좌파 운동하던 나까지 나서겠는가?”라는 의미도 발견한다. 물론 이들의 화려한 문학적 필체는 열거된 요지보다 훨씬 더 우리의 감성과 정서를 깊게 자극한다. 과거 반좌파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그 고난의 덕에 지명도가 올라갔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파 인사들 가운데 휩싸이게 된다. 물론 이들이 주는 혜택도 맛보는 중이다. 이들도 어느덧 변화와 진보가 두려운 처지가 된 것이다. 이들에게 ‘공정사회’라는 단어는 위협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내가 어떤 고생을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러나 이런 유치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낼 사람은 없다. ‘멸공’이라는 포장지가 제격이다.

인간은 그렇게 고차원적인 동물이 아니다. 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욕망이 이데올로기로 포장될 때 일어난다. ‘좌우 이데올로기’라는 ‘가림막’은 인간을 움직이는 추동력이 생존 본능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한다. 그 때문에 이 거룩한 소명은 인권을 유린하고, 죄 없는 사람을 감옥에 넣고, 윤리와 도덕의 폐기를 정당화한다. 수적으로는 적을지라도 태극기 집회가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좌편향 진보 지식인들은 있지만 이들은 이제 좌파 이데올로기의 망령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파는 여전히 ‘멸공’을 이유로 이 유물을 사용하고 있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는 우파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끊임없이 꾸며대고 부풀리는 담론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잃을 것 없는 좌편향은 어차피 거대담론을 만들 필요가 없다. 촛불 광장에 무슨 거대한 ‘나라 사랑’ 같은 구호는 없다. 그들은 ‘좌’도 ‘우’도 아니다. 누군가 이들을 조종한다고 해서 휘둘리는 비이성적인 무리는 더더욱 아니다. 이들을 우파 이데올로기로 재단하는 일을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이 사회가 위험사회인 것은 촛불집회가 아니라 우파 지식인들의 방어적이고 폐쇄적인 태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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