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905년 11월17일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날이다.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는 러일 전쟁의 일본 승리에 힘입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기 위한 책략에 나섰다. 당시 고종 황제는 나름대로 저항하려고 했으나 일제의 강압과 매수에 넘어간 친일 관료들은 이토의 요구대로 협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의 이름도 붙여지지 않은 채, 한동안 ‘을사늑약’이란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몇년 전 한국사 교과서 검정심사에서 ‘늑약’이라는 용어가 청소년에겐 생소하고 감정에 치우치므로 보다 객관화한다는 취지에서 ‘을사조약’이라는 용어로 변경한 바 있다. 현재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을사늑약보다 을사조약을 더 많이 쓰고 있다. 2017학년도 수능을 치르는 날이 바로 11월17일이었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관련 문제가 불거졌다. 한국사 영역, 14번 문제에서 “밑줄 친 ‘신문’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에 대해 지문에서는 “이 때문에 일본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피고인이 양기탁과 함께 발행하는 신문을 이용하려고 한다”고 적시되어 있다. 이것은 분명 영국인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가 틀림없다. 지문으로 제시된 선고문은 이 신문의 공동발행인인 양기탁에 대한 선고이며, 죄목은 국채보상운동 지원금에 대한 횡령 혐의였다. 매우 단순한 문제이고, 논쟁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정답은 물론 “① 국채 보상운동을 지원하였다”로 발표되었지만, “⑤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논한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하였다”는 것도 맞다는 주장이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게재된 곳은 <황성신문> 1905년 11월20일자 논설에 게재된 것이 맞다. 그런데 문제의 출제자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찾아보지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분명 대한매일신보는 11월22일부터 25일까지 황성신문에 실렸던 조약 체결의 전말을 연재하였고, 11월27일에는 호외 2면을 발행하여 앞면에는 다시 조약 체결의 전말을 실었고, 2면에는 영문으로 시일야방성대곡을 번역하여 실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비록 다른 논문에서 나온 것이지만, 직접 원문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최근 한국언론재단에서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전문 번역 및 원문 보기로 확인할 수 있는 빅데이터 신문자료를 구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디지털화로 구축된 역사 지식은 날로 발전하고 있으며 빅데이터를 이용한 다양한 상품 개발, 인공지능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번 수능에서 처음으로 필수과목으로 지정된 한국사 성적은 모든 대학의 입시에 반영될 예정이다. 이번처럼 단순한 지식을 묻거나 획일적인 평가를 담게 되는 수능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단일한 교과서, 국정화 교과서가 간행될 때 이와 같은 오답 시비는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 수능을 치른 날이 마침 국가에서 지정한 국가기념일인 ‘순국선열의 날’이었다. 올해는 77회 기념일이었다. 언제부터인지 헤아려보라. 지금부터 77년 전 193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제정한 날이다. 이날은 순국선열공동기념일이며, 1905년 을사조약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단순히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일제에 대항한 항일언론의 상징이 되고, 그걸 실은 신문이 위대한 신문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정작 항일 논설을 썼던 장지연이 몇년 지나지 않아 1910년대 <경남일보>에 여러 편의 친일 논설을 쓰고 있다는 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런 인물의 상반된 사실과 올바른 역사 이해는 단일한 국정 역사교과서와 5지 선다형의 수능시험을 통해서는 도저히 접해볼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영역이다. 이번 오답 시비는 단순 출제의 잘못이 아니라 총체적인 역사교육의 난국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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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시일야방성대곡’ 오답 시비와 획일화된 역사교과서 / 왕현종 |
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905년 11월17일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날이다.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는 러일 전쟁의 일본 승리에 힘입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기 위한 책략에 나섰다. 당시 고종 황제는 나름대로 저항하려고 했으나 일제의 강압과 매수에 넘어간 친일 관료들은 이토의 요구대로 협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의 이름도 붙여지지 않은 채, 한동안 ‘을사늑약’이란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몇년 전 한국사 교과서 검정심사에서 ‘늑약’이라는 용어가 청소년에겐 생소하고 감정에 치우치므로 보다 객관화한다는 취지에서 ‘을사조약’이라는 용어로 변경한 바 있다. 현재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을사늑약보다 을사조약을 더 많이 쓰고 있다. 2017학년도 수능을 치르는 날이 바로 11월17일이었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관련 문제가 불거졌다. 한국사 영역, 14번 문제에서 “밑줄 친 ‘신문’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에 대해 지문에서는 “이 때문에 일본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피고인이 양기탁과 함께 발행하는 신문을 이용하려고 한다”고 적시되어 있다. 이것은 분명 영국인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가 틀림없다. 지문으로 제시된 선고문은 이 신문의 공동발행인인 양기탁에 대한 선고이며, 죄목은 국채보상운동 지원금에 대한 횡령 혐의였다. 매우 단순한 문제이고, 논쟁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정답은 물론 “① 국채 보상운동을 지원하였다”로 발표되었지만, “⑤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논한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하였다”는 것도 맞다는 주장이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게재된 곳은 <황성신문> 1905년 11월20일자 논설에 게재된 것이 맞다. 그런데 문제의 출제자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찾아보지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분명 대한매일신보는 11월22일부터 25일까지 황성신문에 실렸던 조약 체결의 전말을 연재하였고, 11월27일에는 호외 2면을 발행하여 앞면에는 다시 조약 체결의 전말을 실었고, 2면에는 영문으로 시일야방성대곡을 번역하여 실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비록 다른 논문에서 나온 것이지만, 직접 원문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최근 한국언론재단에서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전문 번역 및 원문 보기로 확인할 수 있는 빅데이터 신문자료를 구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디지털화로 구축된 역사 지식은 날로 발전하고 있으며 빅데이터를 이용한 다양한 상품 개발, 인공지능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번 수능에서 처음으로 필수과목으로 지정된 한국사 성적은 모든 대학의 입시에 반영될 예정이다. 이번처럼 단순한 지식을 묻거나 획일적인 평가를 담게 되는 수능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단일한 교과서, 국정화 교과서가 간행될 때 이와 같은 오답 시비는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 수능을 치른 날이 마침 국가에서 지정한 국가기념일인 ‘순국선열의 날’이었다. 올해는 77회 기념일이었다. 언제부터인지 헤아려보라. 지금부터 77년 전 193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제정한 날이다. 이날은 순국선열공동기념일이며, 1905년 을사조약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단순히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일제에 대항한 항일언론의 상징이 되고, 그걸 실은 신문이 위대한 신문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정작 항일 논설을 썼던 장지연이 몇년 지나지 않아 1910년대 <경남일보>에 여러 편의 친일 논설을 쓰고 있다는 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런 인물의 상반된 사실과 올바른 역사 이해는 단일한 국정 역사교과서와 5지 선다형의 수능시험을 통해서는 도저히 접해볼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영역이다. 이번 오답 시비는 단순 출제의 잘못이 아니라 총체적인 역사교육의 난국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905년 11월17일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날이다.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는 러일 전쟁의 일본 승리에 힘입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기 위한 책략에 나섰다. 당시 고종 황제는 나름대로 저항하려고 했으나 일제의 강압과 매수에 넘어간 친일 관료들은 이토의 요구대로 협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의 이름도 붙여지지 않은 채, 한동안 ‘을사늑약’이란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몇년 전 한국사 교과서 검정심사에서 ‘늑약’이라는 용어가 청소년에겐 생소하고 감정에 치우치므로 보다 객관화한다는 취지에서 ‘을사조약’이라는 용어로 변경한 바 있다. 현재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을사늑약보다 을사조약을 더 많이 쓰고 있다. 2017학년도 수능을 치르는 날이 바로 11월17일이었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관련 문제가 불거졌다. 한국사 영역, 14번 문제에서 “밑줄 친 ‘신문’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에 대해 지문에서는 “이 때문에 일본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피고인이 양기탁과 함께 발행하는 신문을 이용하려고 한다”고 적시되어 있다. 이것은 분명 영국인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가 틀림없다. 지문으로 제시된 선고문은 이 신문의 공동발행인인 양기탁에 대한 선고이며, 죄목은 국채보상운동 지원금에 대한 횡령 혐의였다. 매우 단순한 문제이고, 논쟁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정답은 물론 “① 국채 보상운동을 지원하였다”로 발표되었지만, “⑤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논한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하였다”는 것도 맞다는 주장이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게재된 곳은 <황성신문> 1905년 11월20일자 논설에 게재된 것이 맞다. 그런데 문제의 출제자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찾아보지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분명 대한매일신보는 11월22일부터 25일까지 황성신문에 실렸던 조약 체결의 전말을 연재하였고, 11월27일에는 호외 2면을 발행하여 앞면에는 다시 조약 체결의 전말을 실었고, 2면에는 영문으로 시일야방성대곡을 번역하여 실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비록 다른 논문에서 나온 것이지만, 직접 원문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최근 한국언론재단에서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전문 번역 및 원문 보기로 확인할 수 있는 빅데이터 신문자료를 구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디지털화로 구축된 역사 지식은 날로 발전하고 있으며 빅데이터를 이용한 다양한 상품 개발, 인공지능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번 수능에서 처음으로 필수과목으로 지정된 한국사 성적은 모든 대학의 입시에 반영될 예정이다. 이번처럼 단순한 지식을 묻거나 획일적인 평가를 담게 되는 수능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단일한 교과서, 국정화 교과서가 간행될 때 이와 같은 오답 시비는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 수능을 치른 날이 마침 국가에서 지정한 국가기념일인 ‘순국선열의 날’이었다. 올해는 77회 기념일이었다. 언제부터인지 헤아려보라. 지금부터 77년 전 193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제정한 날이다. 이날은 순국선열공동기념일이며, 1905년 을사조약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단순히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일제에 대항한 항일언론의 상징이 되고, 그걸 실은 신문이 위대한 신문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정작 항일 논설을 썼던 장지연이 몇년 지나지 않아 1910년대 <경남일보>에 여러 편의 친일 논설을 쓰고 있다는 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런 인물의 상반된 사실과 올바른 역사 이해는 단일한 국정 역사교과서와 5지 선다형의 수능시험을 통해서는 도저히 접해볼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영역이다. 이번 오답 시비는 단순 출제의 잘못이 아니라 총체적인 역사교육의 난국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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