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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03 18:39 수정 : 2005.11.03 18:39

왜냐면

월경축제에서는 월경을 즐겁고 기쁘게 여겨야만 한다는 ‘부담’ 을 주며 월경의 고통이나 재생산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거세한다

얼마 전 한 고등학교에서 월경 축제가 열렸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또 이 달 초에 홍대에서 7번째 월경 페스티벌이 열렸으니 이제는 ‘월경’이라는 단어가 ‘금어 목록’에서 자기 몸을 상당히 빼낸 모양이다.

하지만 월경을 당당하게 이야기하자는 그 취지에 적극 지지를 보내면서도 그 축제에 공감하기 힘든 것은 월경을 즐겁고 기쁘게 여겨야만 한다는 ‘부담’ 때문이 아닌가 한다. 월경 축제에서는 월경의 고통이나 재생산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거세시키고 있다. 다만 월경은 한 달에 한번씩 몸이 보내는 ‘신호’이자 ‘일상’이라고 말하고 있고 이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축제를 벌이자고 하지만, 사실 월경은 전혀 즐겁지 않다. 월경은 원천적으로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나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기에 또는 여자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으므로 몇십 년 간 치러야 하는 일이다.

마치 남자들이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입대를 하고 화생방 훈련을 받아야만 하는 것처럼 여자들도 내키지는 않지만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온몸이 밧줄에 얽혀 매이듯이 아파 끙끙대는데 그것을 ‘축제’ ‘즐거움’ ‘일상’과 연결시킬 수 있는 가학적인 여성은 많지 않다. 남성 군인들을 위한 ‘화생방 축제’, ‘즐거운 유격’, ‘일상의 군대’ 이런 슬로건들을 걸고 행사를 진행시킨다고 생각해 보라. 이것들이 당사자들에게 감정적으로 소구될 수 있겠는가?

재생산의 이미지를 없애버리는 것도 위험하다. 재생산 기능의 잠재성 역시 월경의 본질적 성격 중 하나이다. 여성의 생명 창조에는 비극적 숭고함이 있다. 출산에서의 극렬한 고통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육아에서도 여성의 희생은 사실상 불가피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모든 어머니들은 자기 살과 뼈를 떼어내어 한 인간을 만든다. 월경에서 재생산의 이미지를 제외시키는 것은 월경이 갖고 있는 잠재적 숭고함과 여성의 강렬한 모성애까지 버리는 셈인데 그렇게 되면 여성에게 월경은 보람 없는 고통이 되어 여성을 더욱 괴롭게 한다.

문화사가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손대기 전의 그리스·로마 문화사는 인간사의 그늘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채 생의 기쁨을 끊임없이 찬미하는 ‘축제’의 모습이었다. 그리스·로마 역사에 기록될 수 있는 것은 단지 아름답고 완벽하고 신적인 인간의 모습이었으며 그것은 인본주의적 문화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나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왜곡한 것도 사실이며 이제는 아무도 그러한 역사를 믿지 않는다.

월경 축제가 여성의 월경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그것을 그냥 있는 그대로 띄워 보내야만 한다. 의식적으로 진일보한 페미니스트들이 아무리 일반 여성들을 ‘계몽’시키려 노력해도 월경의 강요된 즐거움은 결코 여성의 몸에 각인된, 또는 지금 이 순간도 각인되고 있는 우리의 트라우마를 지우지 못한다. 월경은 같이 울어 줄 수는 있어도 같이 웃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희정/연세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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