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1951년 미국 공공여론조사협회에서 연설하면서 사회학자에게 당부하는 말을 했다. 그는 사회학은 “표면적 여론과 객관적 구조를 결정하는 상황 사이의 연결고리를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도 여론조사는 표면에 드러난 수치를 중시하고 이면에 감춰진 논리를 무시한다.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는 여론조사를 근거로 ‘국회의원 정수 축소’를 ‘새로운 정치’로 제시했다. 이는 정치인에 대한 불만의 표현을 오해한 것에 불과하다. 2012년 대선에서 유력 후보들은 복지국가를 주장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폭발한 ‘무상급식’ 논쟁 이후 복지에 대한 유권자의 기대가 커졌기 때문이다. 여야 후보들은 ‘증세 없는 복지’를 말했다. 복지는 지지해도 증세는 반대하는 여론조사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증세 없는 복지’는 경제학 이론에서 불가능하다. 만약 가능하다면 노벨경제학상을 받을 만하다. 최근 복지국가를 말하는 사람이 사라졌다. 한 대선 후보는 “여론조사에서 경제에 비해 복지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적다”고 말했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최근 한 언론사에서 ‘대선에서 요구되는 비전과 시대적 과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31.7%가 ‘경제성장’을 꼽았다. 이 신문은 “지난 대선 때 시대정신인 ‘경제민주화’는 15.5%로 ‘경제성장’의 절반에 그쳤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질문지를 보면 진실이 드러난다. 다른 답변은 ‘복지 확대’(11.6%), ‘불평등 양극화 해소’(10.6%), ‘기회 균등한 공정사회’(4.6%) 등이었다. 모두 불평등에 관한 문제이다. 합하면 42.3%이다. 어떤 여론이 더 많은가? 정치인은 여론의 지지를 얻어 권력을 얻는다. 그래서 권력을 준 여론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의 과업은 여론의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다. 국가 지도자는 여론에 따라 행동하더라도 그 목적은 환경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페리클레스와 미국의 루스벨트는 정파의 지도자에서 국가의 지도자로 변모했다. 페리클레스는 명문 출신이었으나 평민파를 이끌고 민회와 민중재판소에 권력을 부여해 민주주의를 강화했다. 루스벨트는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대기업과 은행에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고 노동자와 빈곤층을 위한 복지국가를 만들어 사회의 안정을 이루었다. 20세기 후반 선거에서는 딕 모리스와 칼 로브 같은 여론조사 전문가가 전략가의 역할을 수행했다. 21세기에는 분화된 유권자의 욕구를 꿰뚫어보는 빅데이터 전문가가 대신한다. 그러나 중요한 정치 문제는 국가 지도자가 결정하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사람들은 눈앞에 갖다주기 전까지는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애플은 시장조사를 통해서 탄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장조사를 했다면 애플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대통령직선제, 국민건강보험, 햇볕정책, 무상급식은 여론조사의 작품이 아니라 지도자의 비전에 의한 것이다. 성장과 안정만 중시했던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세계경제포럼이 최근 입장을 바꾸어 불평등이 세계의 심각한 도전이라고 인정했다. 불평등을 줄이지 않으면 사회통합도 국민행복도 경제성장도 불가능하다. 지금 한국의 가장 큰 문제도 불평등이다. 청년실업, 비정규직, 전월세 대란 등 심각한 사회문제는 모두 불평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거 정부가 내건 ‘2만달러 시대’는 오래전에 달성되고, 이제 3만달러가 눈앞이지만 무엇이 달라졌는가? 정치의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국가의 부를 늘리는가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모든 국민에게 이익이 되도록 분배하는가의 문제이다. 최근 국제통화기금은 기업과 부자의 세금을 감면해야 투자가 늘어난다는 낙수경제는 실패했다고 인정했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대선 주자들은 성장담론에 치중하고 있다. 최저임금, 공교육, 조세정의에 대한 비전은 희미해졌다. 폴라니가 지적한 대로 표면의 여론에 대응하기만 급급하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해봤자 정치인이다. 지금 한국은 단순한 정치인을 넘어 국가 지도자가 필요한 때이다.
|
[왜냐면] 정치인과 국가 지도자 / 김윤태 |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1951년 미국 공공여론조사협회에서 연설하면서 사회학자에게 당부하는 말을 했다. 그는 사회학은 “표면적 여론과 객관적 구조를 결정하는 상황 사이의 연결고리를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도 여론조사는 표면에 드러난 수치를 중시하고 이면에 감춰진 논리를 무시한다.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는 여론조사를 근거로 ‘국회의원 정수 축소’를 ‘새로운 정치’로 제시했다. 이는 정치인에 대한 불만의 표현을 오해한 것에 불과하다. 2012년 대선에서 유력 후보들은 복지국가를 주장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폭발한 ‘무상급식’ 논쟁 이후 복지에 대한 유권자의 기대가 커졌기 때문이다. 여야 후보들은 ‘증세 없는 복지’를 말했다. 복지는 지지해도 증세는 반대하는 여론조사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증세 없는 복지’는 경제학 이론에서 불가능하다. 만약 가능하다면 노벨경제학상을 받을 만하다. 최근 복지국가를 말하는 사람이 사라졌다. 한 대선 후보는 “여론조사에서 경제에 비해 복지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적다”고 말했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최근 한 언론사에서 ‘대선에서 요구되는 비전과 시대적 과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31.7%가 ‘경제성장’을 꼽았다. 이 신문은 “지난 대선 때 시대정신인 ‘경제민주화’는 15.5%로 ‘경제성장’의 절반에 그쳤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질문지를 보면 진실이 드러난다. 다른 답변은 ‘복지 확대’(11.6%), ‘불평등 양극화 해소’(10.6%), ‘기회 균등한 공정사회’(4.6%) 등이었다. 모두 불평등에 관한 문제이다. 합하면 42.3%이다. 어떤 여론이 더 많은가? 정치인은 여론의 지지를 얻어 권력을 얻는다. 그래서 권력을 준 여론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의 과업은 여론의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다. 국가 지도자는 여론에 따라 행동하더라도 그 목적은 환경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페리클레스와 미국의 루스벨트는 정파의 지도자에서 국가의 지도자로 변모했다. 페리클레스는 명문 출신이었으나 평민파를 이끌고 민회와 민중재판소에 권력을 부여해 민주주의를 강화했다. 루스벨트는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대기업과 은행에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고 노동자와 빈곤층을 위한 복지국가를 만들어 사회의 안정을 이루었다. 20세기 후반 선거에서는 딕 모리스와 칼 로브 같은 여론조사 전문가가 전략가의 역할을 수행했다. 21세기에는 분화된 유권자의 욕구를 꿰뚫어보는 빅데이터 전문가가 대신한다. 그러나 중요한 정치 문제는 국가 지도자가 결정하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사람들은 눈앞에 갖다주기 전까지는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애플은 시장조사를 통해서 탄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장조사를 했다면 애플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대통령직선제, 국민건강보험, 햇볕정책, 무상급식은 여론조사의 작품이 아니라 지도자의 비전에 의한 것이다. 성장과 안정만 중시했던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세계경제포럼이 최근 입장을 바꾸어 불평등이 세계의 심각한 도전이라고 인정했다. 불평등을 줄이지 않으면 사회통합도 국민행복도 경제성장도 불가능하다. 지금 한국의 가장 큰 문제도 불평등이다. 청년실업, 비정규직, 전월세 대란 등 심각한 사회문제는 모두 불평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거 정부가 내건 ‘2만달러 시대’는 오래전에 달성되고, 이제 3만달러가 눈앞이지만 무엇이 달라졌는가? 정치의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국가의 부를 늘리는가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모든 국민에게 이익이 되도록 분배하는가의 문제이다. 최근 국제통화기금은 기업과 부자의 세금을 감면해야 투자가 늘어난다는 낙수경제는 실패했다고 인정했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대선 주자들은 성장담론에 치중하고 있다. 최저임금, 공교육, 조세정의에 대한 비전은 희미해졌다. 폴라니가 지적한 대로 표면의 여론에 대응하기만 급급하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해봤자 정치인이다. 지금 한국은 단순한 정치인을 넘어 국가 지도자가 필요한 때이다.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1951년 미국 공공여론조사협회에서 연설하면서 사회학자에게 당부하는 말을 했다. 그는 사회학은 “표면적 여론과 객관적 구조를 결정하는 상황 사이의 연결고리를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도 여론조사는 표면에 드러난 수치를 중시하고 이면에 감춰진 논리를 무시한다.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는 여론조사를 근거로 ‘국회의원 정수 축소’를 ‘새로운 정치’로 제시했다. 이는 정치인에 대한 불만의 표현을 오해한 것에 불과하다. 2012년 대선에서 유력 후보들은 복지국가를 주장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폭발한 ‘무상급식’ 논쟁 이후 복지에 대한 유권자의 기대가 커졌기 때문이다. 여야 후보들은 ‘증세 없는 복지’를 말했다. 복지는 지지해도 증세는 반대하는 여론조사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증세 없는 복지’는 경제학 이론에서 불가능하다. 만약 가능하다면 노벨경제학상을 받을 만하다. 최근 복지국가를 말하는 사람이 사라졌다. 한 대선 후보는 “여론조사에서 경제에 비해 복지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적다”고 말했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최근 한 언론사에서 ‘대선에서 요구되는 비전과 시대적 과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31.7%가 ‘경제성장’을 꼽았다. 이 신문은 “지난 대선 때 시대정신인 ‘경제민주화’는 15.5%로 ‘경제성장’의 절반에 그쳤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질문지를 보면 진실이 드러난다. 다른 답변은 ‘복지 확대’(11.6%), ‘불평등 양극화 해소’(10.6%), ‘기회 균등한 공정사회’(4.6%) 등이었다. 모두 불평등에 관한 문제이다. 합하면 42.3%이다. 어떤 여론이 더 많은가? 정치인은 여론의 지지를 얻어 권력을 얻는다. 그래서 권력을 준 여론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의 과업은 여론의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다. 국가 지도자는 여론에 따라 행동하더라도 그 목적은 환경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페리클레스와 미국의 루스벨트는 정파의 지도자에서 국가의 지도자로 변모했다. 페리클레스는 명문 출신이었으나 평민파를 이끌고 민회와 민중재판소에 권력을 부여해 민주주의를 강화했다. 루스벨트는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대기업과 은행에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고 노동자와 빈곤층을 위한 복지국가를 만들어 사회의 안정을 이루었다. 20세기 후반 선거에서는 딕 모리스와 칼 로브 같은 여론조사 전문가가 전략가의 역할을 수행했다. 21세기에는 분화된 유권자의 욕구를 꿰뚫어보는 빅데이터 전문가가 대신한다. 그러나 중요한 정치 문제는 국가 지도자가 결정하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사람들은 눈앞에 갖다주기 전까지는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애플은 시장조사를 통해서 탄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장조사를 했다면 애플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대통령직선제, 국민건강보험, 햇볕정책, 무상급식은 여론조사의 작품이 아니라 지도자의 비전에 의한 것이다. 성장과 안정만 중시했던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세계경제포럼이 최근 입장을 바꾸어 불평등이 세계의 심각한 도전이라고 인정했다. 불평등을 줄이지 않으면 사회통합도 국민행복도 경제성장도 불가능하다. 지금 한국의 가장 큰 문제도 불평등이다. 청년실업, 비정규직, 전월세 대란 등 심각한 사회문제는 모두 불평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거 정부가 내건 ‘2만달러 시대’는 오래전에 달성되고, 이제 3만달러가 눈앞이지만 무엇이 달라졌는가? 정치의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국가의 부를 늘리는가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모든 국민에게 이익이 되도록 분배하는가의 문제이다. 최근 국제통화기금은 기업과 부자의 세금을 감면해야 투자가 늘어난다는 낙수경제는 실패했다고 인정했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대선 주자들은 성장담론에 치중하고 있다. 최저임금, 공교육, 조세정의에 대한 비전은 희미해졌다. 폴라니가 지적한 대로 표면의 여론에 대응하기만 급급하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해봤자 정치인이다. 지금 한국은 단순한 정치인을 넘어 국가 지도자가 필요한 때이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