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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31 18:24 수정 : 2005.10.31 18:24

왜냐면

항일 민족정신을 남북을 포함하여 모든 한민족의 자주·독립·평화 정신으로 자리매김하여 정신적 지주로 삼아야 할 것이다.

11월3일은 학생의 날이다. 전국의 몇몇 지역에서 이날에 학생을 위한 행사가 열린다. 그런데 그 행사란 어린이날이나 어버이날처럼 그저 학생이 주인공인 날처럼 다루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사실 ‘학생의 날’은 역사적 배경을 보면, 결코 가벼운 날이 아니다. 일제가 1919년 3·1운동 이후, 문화정책이랍시고 약간의 유화정책을 쓴 지 10년이 지난 1929년 11월3일에 광주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학생 독립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일본 학생이 조선 여학생의 댕기를 잡아당겨서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이미 한 해 전에 동맹휴학 사건으로 소수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학생이 제적되거나 정학을 당한 사건이 ‘광주고등보통학교’라는 조선인 남학교에서 있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광주에서 시작되었고, 광주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파시키려 장재성 등이 주도적으로 노력한 것은 사실이나 광주만의 운동은 아니다. 이 시위는 곧 목포와 나주로 확산되었고, 12월에는 서울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이듬해 1월엔 새학기를 맞아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급기야 이 학생 독립운동에 참여한 학교는 전국적으로 194곳(북한 소재 학교 76곳 포함), 참여 학생 수는 5만4천명에 이른다.

1953년 정부는 11월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공포하였다.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는 당시에 국회 주도 아래 전 국민의 성금으로 기념탑이 세워졌고, 대통령도 기념탑 앞의 행사에 참여할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기껏해야 광주지역 고등학교 학생회장단이 11월3일 아침에 기념탑 참배를 하고, 광주일고 강당에서 광주광역시교육청 주관으로 간단한 기념식을 하는 정도로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왜 이렇게 축소되었는가? 첫째, 역대 독재 정권들이, 학생의 의식화가 두려워 축소하려 노력했으며, 한때는 학생의 날을 없애기도 했기 때문이다(학생탑 전면에는 ‘우리는 피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1984년 부활했을 때엔 의미가 변질되었다.

둘째, 우리 학생들이 입시교육에 찌들어 주체의식을 갖지 못한 관계로 훌륭한 선배의 정신을 이을 생각을 못한 결과다. 셋째, 광주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유로 광주지역의 사건으로 치부해버리려는 다른 지역의 지역주의가 영향을 끼쳤다. 넷째, 당시 주도세력 중 좌익 등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계승사업의 영향도 있다.

단순히 학생이 주인공이라는 가벼운 행사로 치르지 말고, 좌·우익을 망라한 제대로 된 역사를 발굴하여 정리해야 한다. 가벼움이 지나친 요즘 학생들이 주체의식을 갖고, 당시의 항일 민족정신을 오늘의 시대정신으로 되살려 전통을 잇고, 남북을 포함하여 모든 한민족의 자주·독립·평화 정신으로 자리매김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김종근/광주전남 교육연대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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