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대 경제학과 교수 8월1일치 내 칼럼에 대해 독자 한 분의 반론글(8월9일치)이 실렸다. 서로 다른 견해의 자유로운 개진은 매우 바람직해서 아무런 문제가 있을 수 없지만 단지 마르크스와 관련된 부분이 독자들에게 혼동을 줄 우려가 있어서 답변을 올린다. 크게 세 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데, 사실 이것들은 모두 내가 쓴 <자본> 해설서들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어서, 짧게 돌이키는 것일 뿐이다. 첫째, 자본주의와 봉건제의 구별이 교환에 있지 않으며 모든 생산양식에 교환이 존재한다는 견해. 이 견해는 애덤 스미스 이후 부르주아 경제학에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자본주의를 역사적으로 영속불변의 경제체제로 상정한다(몰역사성). 인간은 교환의 본성을 가지고 있고 모든 생산은 교환을 위한 것이어서 자본주의 이전의 생산도 상품생산이라는 주장이다(단순 상품생산).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이전의 생산양식과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모순의 근원이라고 간주하였는데, 곧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고 교환이 이를 매개하는 구조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이 상품에서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소비를 위한 생산(현물의 자급, 사용가치)이 교환을 위한 생산(상품의 교환, 교환가치)으로 바뀐다는 것이고 이것이 그의 전체 논의의 출발점을 이룬다. 여기에 기초하여 마르크스는 <자본> 제2권에서 생산과 소비의 불일치를 다룬 다음 제3권에서 그 불일치가 자본주의 위기를 가져오는 필연성을 논증하였다. 둘째, 독자께서는 생산양식의 구별이 ‘교환 일반’이 아니라 ‘교환의 역사적 형태’라고 하였는데, 이 견해는 나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이다. 봉건제에서도 교환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매우 미미해서 생산의 성격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구별 기준은 ‘교환의 역사적 형태’가 아니라 ‘교환이 지배적인지의 여부’였다. 혹시 ‘교환의 역사적 형태’가 노동력의 교환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그것은 <자본>의 논의 구조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가치를 다룬 교환영역의 논의를 끝내고 가치의 생산을 다루는 생산영역으로 이미 논의를 옮긴 다음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마르크스를 읽어나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의 논의는 철저히 순차적으로 앞부분의 논의를 바탕으로 뒷부분이 차곡차곡 쌓이듯 이어지고 있어서 이들 각 부분 사이의 순차적 관련을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장님 코끼리 만지듯 전체 논의가 뒤섞여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셋째, 기계로 인해 노동자들의 상태가 더욱 악화된다는 견해. 맞는 얘기이다. <자본> 제1권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의 내용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논의는 여기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기계에 의한 생산력의 발전이 노동해방의 토대가 된다는 점으로 이어진다. 제3권 제1편의 논의가 주로 그것이다.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은 ‘부정의 부정’을 준비하는 과정이고 이것이 사물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변증법적 관점이다. 사실 마르크스의 중요성은 단순히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넘어서서 그것의 변증법적 지양을 제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물론 부정의 부정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생산관계의 사회화와 민주주의의 확대가 그런 이행의 조건이라는 점을 말미에 덧붙여 두었다. 그리고 그 조건은 노동자 자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알파고 괴담에 지레 휩쓸리지 말고 자신의 길만 보자는 것이 내 글의 취지였던 것이다. 스파르타쿠스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너의 길을 걸어라! 그리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대로 내버려두어라!” <자본> 서문의 유명한 인용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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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오류투성이 일자리 절벽 해답” 비판에 대해 / 강신준 |
강신준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 8월1일치 내 칼럼에 대해 독자 한 분의 반론글(8월9일치)이 실렸다. 서로 다른 견해의 자유로운 개진은 매우 바람직해서 아무런 문제가 있을 수 없지만 단지 마르크스와 관련된 부분이 독자들에게 혼동을 줄 우려가 있어서 답변을 올린다. 크게 세 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데, 사실 이것들은 모두 내가 쓴 <자본> 해설서들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어서, 짧게 돌이키는 것일 뿐이다. 첫째, 자본주의와 봉건제의 구별이 교환에 있지 않으며 모든 생산양식에 교환이 존재한다는 견해. 이 견해는 애덤 스미스 이후 부르주아 경제학에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자본주의를 역사적으로 영속불변의 경제체제로 상정한다(몰역사성). 인간은 교환의 본성을 가지고 있고 모든 생산은 교환을 위한 것이어서 자본주의 이전의 생산도 상품생산이라는 주장이다(단순 상품생산).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이전의 생산양식과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모순의 근원이라고 간주하였는데, 곧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고 교환이 이를 매개하는 구조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이 상품에서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소비를 위한 생산(현물의 자급, 사용가치)이 교환을 위한 생산(상품의 교환, 교환가치)으로 바뀐다는 것이고 이것이 그의 전체 논의의 출발점을 이룬다. 여기에 기초하여 마르크스는 <자본> 제2권에서 생산과 소비의 불일치를 다룬 다음 제3권에서 그 불일치가 자본주의 위기를 가져오는 필연성을 논증하였다. 둘째, 독자께서는 생산양식의 구별이 ‘교환 일반’이 아니라 ‘교환의 역사적 형태’라고 하였는데, 이 견해는 나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이다. 봉건제에서도 교환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매우 미미해서 생산의 성격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구별 기준은 ‘교환의 역사적 형태’가 아니라 ‘교환이 지배적인지의 여부’였다. 혹시 ‘교환의 역사적 형태’가 노동력의 교환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그것은 <자본>의 논의 구조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가치를 다룬 교환영역의 논의를 끝내고 가치의 생산을 다루는 생산영역으로 이미 논의를 옮긴 다음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마르크스를 읽어나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의 논의는 철저히 순차적으로 앞부분의 논의를 바탕으로 뒷부분이 차곡차곡 쌓이듯 이어지고 있어서 이들 각 부분 사이의 순차적 관련을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장님 코끼리 만지듯 전체 논의가 뒤섞여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셋째, 기계로 인해 노동자들의 상태가 더욱 악화된다는 견해. 맞는 얘기이다. <자본> 제1권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의 내용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논의는 여기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기계에 의한 생산력의 발전이 노동해방의 토대가 된다는 점으로 이어진다. 제3권 제1편의 논의가 주로 그것이다.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은 ‘부정의 부정’을 준비하는 과정이고 이것이 사물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변증법적 관점이다. 사실 마르크스의 중요성은 단순히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넘어서서 그것의 변증법적 지양을 제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물론 부정의 부정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생산관계의 사회화와 민주주의의 확대가 그런 이행의 조건이라는 점을 말미에 덧붙여 두었다. 그리고 그 조건은 노동자 자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알파고 괴담에 지레 휩쓸리지 말고 자신의 길만 보자는 것이 내 글의 취지였던 것이다. 스파르타쿠스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너의 길을 걸어라! 그리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대로 내버려두어라!” <자본> 서문의 유명한 인용 구절이다.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 8월1일치 내 칼럼에 대해 독자 한 분의 반론글(8월9일치)이 실렸다. 서로 다른 견해의 자유로운 개진은 매우 바람직해서 아무런 문제가 있을 수 없지만 단지 마르크스와 관련된 부분이 독자들에게 혼동을 줄 우려가 있어서 답변을 올린다. 크게 세 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데, 사실 이것들은 모두 내가 쓴 <자본> 해설서들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어서, 짧게 돌이키는 것일 뿐이다. 첫째, 자본주의와 봉건제의 구별이 교환에 있지 않으며 모든 생산양식에 교환이 존재한다는 견해. 이 견해는 애덤 스미스 이후 부르주아 경제학에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자본주의를 역사적으로 영속불변의 경제체제로 상정한다(몰역사성). 인간은 교환의 본성을 가지고 있고 모든 생산은 교환을 위한 것이어서 자본주의 이전의 생산도 상품생산이라는 주장이다(단순 상품생산).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이전의 생산양식과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모순의 근원이라고 간주하였는데, 곧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고 교환이 이를 매개하는 구조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이 상품에서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소비를 위한 생산(현물의 자급, 사용가치)이 교환을 위한 생산(상품의 교환, 교환가치)으로 바뀐다는 것이고 이것이 그의 전체 논의의 출발점을 이룬다. 여기에 기초하여 마르크스는 <자본> 제2권에서 생산과 소비의 불일치를 다룬 다음 제3권에서 그 불일치가 자본주의 위기를 가져오는 필연성을 논증하였다. 둘째, 독자께서는 생산양식의 구별이 ‘교환 일반’이 아니라 ‘교환의 역사적 형태’라고 하였는데, 이 견해는 나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이다. 봉건제에서도 교환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매우 미미해서 생산의 성격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구별 기준은 ‘교환의 역사적 형태’가 아니라 ‘교환이 지배적인지의 여부’였다. 혹시 ‘교환의 역사적 형태’가 노동력의 교환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그것은 <자본>의 논의 구조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가치를 다룬 교환영역의 논의를 끝내고 가치의 생산을 다루는 생산영역으로 이미 논의를 옮긴 다음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마르크스를 읽어나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의 논의는 철저히 순차적으로 앞부분의 논의를 바탕으로 뒷부분이 차곡차곡 쌓이듯 이어지고 있어서 이들 각 부분 사이의 순차적 관련을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장님 코끼리 만지듯 전체 논의가 뒤섞여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셋째, 기계로 인해 노동자들의 상태가 더욱 악화된다는 견해. 맞는 얘기이다. <자본> 제1권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의 내용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논의는 여기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기계에 의한 생산력의 발전이 노동해방의 토대가 된다는 점으로 이어진다. 제3권 제1편의 논의가 주로 그것이다.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은 ‘부정의 부정’을 준비하는 과정이고 이것이 사물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변증법적 관점이다. 사실 마르크스의 중요성은 단순히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넘어서서 그것의 변증법적 지양을 제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물론 부정의 부정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생산관계의 사회화와 민주주의의 확대가 그런 이행의 조건이라는 점을 말미에 덧붙여 두었다. 그리고 그 조건은 노동자 자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알파고 괴담에 지레 휩쓸리지 말고 자신의 길만 보자는 것이 내 글의 취지였던 것이다. 스파르타쿠스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너의 길을 걸어라! 그리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대로 내버려두어라!” <자본> 서문의 유명한 인용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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