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노동자 강신준 교수가 8월1일치 <한겨레>에 기고한 ‘알파고 일자리 절벽 괴담의 해답’은 <자본>의 번역자이자 저명한 마르크스 권위자가 썼다고 보기에는 비논리성과 역사에 대한 몰이해가 두드러진다. 칼럼에서 강신준 교수는 요즘 사람들이 걱정하는 일자리 절벽에 대해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단언하며 그 ‘과학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 생산체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이며, 다른 하나는 노예가 노동을 전담했던 노예제 사회에서 시민들이 처한 조건이다. 우선 마르크스의 분석이라며 소개하는 봉건제와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봉건제는 생산과 소비가 ‘일치하는’ 체제인가? 봉건제에서 생산을 하는 농노와 생산물을 취하는 지배계급인 봉건 영주와 종교인들은 과연 일치하는가? 생산과 소비의 일치는 기껏해야 소농이나 수공업자들의 폐쇄된 공동체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생산도구가 소규모이고 원시적인 곳에서만 가능하다. 봉건제 역시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어 있으며 생산물을 전유하는 방식에서 자본주의와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역사상 존재한 모든 계급사회는 생산과 소비의 분리로 특징지어지며, 이 둘은 언제나 ‘교환’으로 매개된다. ‘교환 일반’이 아니라 ‘교환의 역사적 형태’에 의해 각각의 생산양식들은 구별된다. 또한 이윤을 ‘수익’이라 부르며 ‘구매한 가격보다 더 비싸게 판매하는 것’으로 단순화한다면 마르크스가 굳이 생애를 바쳐 <자본>을 쓸 필요가 없었으리라. 하지만 마르크스가 이론적으로 규명하려 했던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이윤은 ‘등가교환’으로 보이는 노-자 관계에서 발생하는 이윤이고,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자본>에서 ‘노동’과 ‘노동력’을 구분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음으로 강신준 교수는 다가올 인공지능 시대를 고대 로마에 빗대고 있다. 고대 로마의 시민들은 다양한 편의가 사회적으로 제공되는 가운데 철학·예술·문학을 향유하며 여가시간을 보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노예가 고된 노동을 전담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이 일반화하고 생산력이 증대되면 우리도 노동에서 해방될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고대 로마를 저렇게 ‘장밋빛’으로 묘사하는 것이 반란 노예 스파르타쿠스를 가장 좋아하는 역사 인물로 꼽았던 마르크스의 정신에 부합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강신준 교수가 알파고의 승리를 보며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인공지능을 노예에 대응하고 있지만, 사실 인공지능은 기계와 같은 도구일 뿐이다. 기계의 확산이 노동자를 해방시켰는가? 이 점을 이해하는 데 많은 상상력이 필요치 않다. 비정규직과 장시간 노동이 일반화된, 산업재해가 끊이지 않는 바로 현실이 그 증거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들이 기계의 도구로, 즉 고대 로마의 노예와 같은 위치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는 칼럼에서 넘겨짚은 ‘노동하지 않고 먹고사는 방법’ 따위와는 전혀 다른 불안이다. 강신준 교수는 ‘누구에게’ 말하는 것일까? 적어도 고대 로마의 노예와도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그가 상정하는 청중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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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오류투성이 일자리 절벽 해답 / 장원 |
장원
출판노동자 강신준 교수가 8월1일치 <한겨레>에 기고한 ‘알파고 일자리 절벽 괴담의 해답’은 <자본>의 번역자이자 저명한 마르크스 권위자가 썼다고 보기에는 비논리성과 역사에 대한 몰이해가 두드러진다. 칼럼에서 강신준 교수는 요즘 사람들이 걱정하는 일자리 절벽에 대해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단언하며 그 ‘과학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 생산체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이며, 다른 하나는 노예가 노동을 전담했던 노예제 사회에서 시민들이 처한 조건이다. 우선 마르크스의 분석이라며 소개하는 봉건제와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봉건제는 생산과 소비가 ‘일치하는’ 체제인가? 봉건제에서 생산을 하는 농노와 생산물을 취하는 지배계급인 봉건 영주와 종교인들은 과연 일치하는가? 생산과 소비의 일치는 기껏해야 소농이나 수공업자들의 폐쇄된 공동체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생산도구가 소규모이고 원시적인 곳에서만 가능하다. 봉건제 역시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어 있으며 생산물을 전유하는 방식에서 자본주의와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역사상 존재한 모든 계급사회는 생산과 소비의 분리로 특징지어지며, 이 둘은 언제나 ‘교환’으로 매개된다. ‘교환 일반’이 아니라 ‘교환의 역사적 형태’에 의해 각각의 생산양식들은 구별된다. 또한 이윤을 ‘수익’이라 부르며 ‘구매한 가격보다 더 비싸게 판매하는 것’으로 단순화한다면 마르크스가 굳이 생애를 바쳐 <자본>을 쓸 필요가 없었으리라. 하지만 마르크스가 이론적으로 규명하려 했던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이윤은 ‘등가교환’으로 보이는 노-자 관계에서 발생하는 이윤이고,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자본>에서 ‘노동’과 ‘노동력’을 구분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음으로 강신준 교수는 다가올 인공지능 시대를 고대 로마에 빗대고 있다. 고대 로마의 시민들은 다양한 편의가 사회적으로 제공되는 가운데 철학·예술·문학을 향유하며 여가시간을 보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노예가 고된 노동을 전담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이 일반화하고 생산력이 증대되면 우리도 노동에서 해방될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고대 로마를 저렇게 ‘장밋빛’으로 묘사하는 것이 반란 노예 스파르타쿠스를 가장 좋아하는 역사 인물로 꼽았던 마르크스의 정신에 부합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강신준 교수가 알파고의 승리를 보며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인공지능을 노예에 대응하고 있지만, 사실 인공지능은 기계와 같은 도구일 뿐이다. 기계의 확산이 노동자를 해방시켰는가? 이 점을 이해하는 데 많은 상상력이 필요치 않다. 비정규직과 장시간 노동이 일반화된, 산업재해가 끊이지 않는 바로 현실이 그 증거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들이 기계의 도구로, 즉 고대 로마의 노예와 같은 위치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는 칼럼에서 넘겨짚은 ‘노동하지 않고 먹고사는 방법’ 따위와는 전혀 다른 불안이다. 강신준 교수는 ‘누구에게’ 말하는 것일까? 적어도 고대 로마의 노예와도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그가 상정하는 청중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출판노동자 강신준 교수가 8월1일치 <한겨레>에 기고한 ‘알파고 일자리 절벽 괴담의 해답’은 <자본>의 번역자이자 저명한 마르크스 권위자가 썼다고 보기에는 비논리성과 역사에 대한 몰이해가 두드러진다. 칼럼에서 강신준 교수는 요즘 사람들이 걱정하는 일자리 절벽에 대해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단언하며 그 ‘과학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 생산체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이며, 다른 하나는 노예가 노동을 전담했던 노예제 사회에서 시민들이 처한 조건이다. 우선 마르크스의 분석이라며 소개하는 봉건제와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봉건제는 생산과 소비가 ‘일치하는’ 체제인가? 봉건제에서 생산을 하는 농노와 생산물을 취하는 지배계급인 봉건 영주와 종교인들은 과연 일치하는가? 생산과 소비의 일치는 기껏해야 소농이나 수공업자들의 폐쇄된 공동체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생산도구가 소규모이고 원시적인 곳에서만 가능하다. 봉건제 역시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어 있으며 생산물을 전유하는 방식에서 자본주의와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역사상 존재한 모든 계급사회는 생산과 소비의 분리로 특징지어지며, 이 둘은 언제나 ‘교환’으로 매개된다. ‘교환 일반’이 아니라 ‘교환의 역사적 형태’에 의해 각각의 생산양식들은 구별된다. 또한 이윤을 ‘수익’이라 부르며 ‘구매한 가격보다 더 비싸게 판매하는 것’으로 단순화한다면 마르크스가 굳이 생애를 바쳐 <자본>을 쓸 필요가 없었으리라. 하지만 마르크스가 이론적으로 규명하려 했던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이윤은 ‘등가교환’으로 보이는 노-자 관계에서 발생하는 이윤이고,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자본>에서 ‘노동’과 ‘노동력’을 구분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음으로 강신준 교수는 다가올 인공지능 시대를 고대 로마에 빗대고 있다. 고대 로마의 시민들은 다양한 편의가 사회적으로 제공되는 가운데 철학·예술·문학을 향유하며 여가시간을 보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노예가 고된 노동을 전담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이 일반화하고 생산력이 증대되면 우리도 노동에서 해방될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고대 로마를 저렇게 ‘장밋빛’으로 묘사하는 것이 반란 노예 스파르타쿠스를 가장 좋아하는 역사 인물로 꼽았던 마르크스의 정신에 부합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강신준 교수가 알파고의 승리를 보며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인공지능을 노예에 대응하고 있지만, 사실 인공지능은 기계와 같은 도구일 뿐이다. 기계의 확산이 노동자를 해방시켰는가? 이 점을 이해하는 데 많은 상상력이 필요치 않다. 비정규직과 장시간 노동이 일반화된, 산업재해가 끊이지 않는 바로 현실이 그 증거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들이 기계의 도구로, 즉 고대 로마의 노예와 같은 위치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는 칼럼에서 넘겨짚은 ‘노동하지 않고 먹고사는 방법’ 따위와는 전혀 다른 불안이다. 강신준 교수는 ‘누구에게’ 말하는 것일까? 적어도 고대 로마의 노예와도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그가 상정하는 청중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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