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연세국제평론> 부편집장 소유하는 개인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와 더불어 민주주의 역시 개인이 주인공이다. 민주주의는 표현하는 개인으로 시작해 소통하는 집단으로 완성된다. 한국 사회는 민주공화국으로 정체(政體)를 밝힌 헌법 제1조 제1항의 선포에도 불구하고 ‘소통하는 집단’의 존재 여부에 대해 ‘표현하는 개인’의 그것만큼 사회적 공감대와 승인이 준비돼 있지 않다. 한국 사회가 권위주의적이라는 혐의로부터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 가지 유형으로 전통적·합법적·카리스마적 권위를 제시한 막스 베버의 지적 울림은 그렇기에 지금도 크다. ‘나이’가 혈연 세습의 공백을 메꾸어 전통적 권위로, 직업으로 표상되는 ‘사회적 지위’가 합법적 권위로 변주돼 한국 사회에서 개인과 집단의 소통방식을 결정하고 있다. 물론 유럽과 미국을 위시한 서양도 나이와 사회적 지위를 존중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양자가 ‘교통’의 맥을 조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압박하고 있다. 나이와 사회적 지위 소개를 통성명의 첫 단계로 채택하는 소통방식이 만국 공통이라는 지적은 아주 틀리지 않다. 한국은 소개된 나이와 사회적 지위가 이후의 모든 교류에서 소통 참여자의 정체성을 ‘형과 동생’ 또는 ‘선임과 후임’으로 재규정해 각자 기대되는 역할에 맞게 철저히 대응할 것을 강력히 주문하고 있다는 데서 독보적이다. 특히 통성명에서 나이 소개를 생략할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형과 동생의 소통은 동등한 개인과의 그것과 동일하기 어렵다. 한쪽이 매번 존댓말로 응해야 한다면 더욱 그렇다. 소통의 내용 전에 형식이 자유로운 분출을 억제하는 데 일조한다. 선임과 후임 간의 소통은 더 복잡하다. 사회적 지위는 사적인 관계를 넘어 공적인 관계를 전제한다. 소통방식이 더욱 경직된다. 할 것과 하지 말 것에 대한 강요된 집착이 소통의 내용과 형식 모두 왜곡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의전서열에 따른 자리 배치나 발언권을 상기하는 건 미시적 우려다. 그보다 소통의 종착점에서 잉태되는 새로운 결론이 절대 지위로부터 무오류의 갑옷을 덮어쓴 채 하달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소통하지 못하는 집단은 사회의 결단력을 갉아먹고 구성원의 결속력을 와해시킨다. 관계 악화로 더 빈번하게 귀결되는 한국 사회의 ‘야자타임’은 파국으로 치닫는 ‘압박된 교통’의 민낯이다. 적시에 친절하게 배출되지 못한 소통 욕구는 나중에 불쾌하게 배설될 뿐이다. 진보보다는 퇴보를 유도하는 병리적 현상 앞에 침묵은 소통경화(硬化)를 이끈다. 적시에 경직된 소통의 줄기를 풀어야 한다. 나중에 결속의 매듭이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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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권위는 어떻게 소통을 가로막나 / 최시영 |
최시영
전 <연세국제평론> 부편집장 소유하는 개인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와 더불어 민주주의 역시 개인이 주인공이다. 민주주의는 표현하는 개인으로 시작해 소통하는 집단으로 완성된다. 한국 사회는 민주공화국으로 정체(政體)를 밝힌 헌법 제1조 제1항의 선포에도 불구하고 ‘소통하는 집단’의 존재 여부에 대해 ‘표현하는 개인’의 그것만큼 사회적 공감대와 승인이 준비돼 있지 않다. 한국 사회가 권위주의적이라는 혐의로부터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 가지 유형으로 전통적·합법적·카리스마적 권위를 제시한 막스 베버의 지적 울림은 그렇기에 지금도 크다. ‘나이’가 혈연 세습의 공백을 메꾸어 전통적 권위로, 직업으로 표상되는 ‘사회적 지위’가 합법적 권위로 변주돼 한국 사회에서 개인과 집단의 소통방식을 결정하고 있다. 물론 유럽과 미국을 위시한 서양도 나이와 사회적 지위를 존중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양자가 ‘교통’의 맥을 조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압박하고 있다. 나이와 사회적 지위 소개를 통성명의 첫 단계로 채택하는 소통방식이 만국 공통이라는 지적은 아주 틀리지 않다. 한국은 소개된 나이와 사회적 지위가 이후의 모든 교류에서 소통 참여자의 정체성을 ‘형과 동생’ 또는 ‘선임과 후임’으로 재규정해 각자 기대되는 역할에 맞게 철저히 대응할 것을 강력히 주문하고 있다는 데서 독보적이다. 특히 통성명에서 나이 소개를 생략할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형과 동생의 소통은 동등한 개인과의 그것과 동일하기 어렵다. 한쪽이 매번 존댓말로 응해야 한다면 더욱 그렇다. 소통의 내용 전에 형식이 자유로운 분출을 억제하는 데 일조한다. 선임과 후임 간의 소통은 더 복잡하다. 사회적 지위는 사적인 관계를 넘어 공적인 관계를 전제한다. 소통방식이 더욱 경직된다. 할 것과 하지 말 것에 대한 강요된 집착이 소통의 내용과 형식 모두 왜곡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의전서열에 따른 자리 배치나 발언권을 상기하는 건 미시적 우려다. 그보다 소통의 종착점에서 잉태되는 새로운 결론이 절대 지위로부터 무오류의 갑옷을 덮어쓴 채 하달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소통하지 못하는 집단은 사회의 결단력을 갉아먹고 구성원의 결속력을 와해시킨다. 관계 악화로 더 빈번하게 귀결되는 한국 사회의 ‘야자타임’은 파국으로 치닫는 ‘압박된 교통’의 민낯이다. 적시에 친절하게 배출되지 못한 소통 욕구는 나중에 불쾌하게 배설될 뿐이다. 진보보다는 퇴보를 유도하는 병리적 현상 앞에 침묵은 소통경화(硬化)를 이끈다. 적시에 경직된 소통의 줄기를 풀어야 한다. 나중에 결속의 매듭이 풀린다.
전 <연세국제평론> 부편집장 소유하는 개인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와 더불어 민주주의 역시 개인이 주인공이다. 민주주의는 표현하는 개인으로 시작해 소통하는 집단으로 완성된다. 한국 사회는 민주공화국으로 정체(政體)를 밝힌 헌법 제1조 제1항의 선포에도 불구하고 ‘소통하는 집단’의 존재 여부에 대해 ‘표현하는 개인’의 그것만큼 사회적 공감대와 승인이 준비돼 있지 않다. 한국 사회가 권위주의적이라는 혐의로부터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 가지 유형으로 전통적·합법적·카리스마적 권위를 제시한 막스 베버의 지적 울림은 그렇기에 지금도 크다. ‘나이’가 혈연 세습의 공백을 메꾸어 전통적 권위로, 직업으로 표상되는 ‘사회적 지위’가 합법적 권위로 변주돼 한국 사회에서 개인과 집단의 소통방식을 결정하고 있다. 물론 유럽과 미국을 위시한 서양도 나이와 사회적 지위를 존중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양자가 ‘교통’의 맥을 조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압박하고 있다. 나이와 사회적 지위 소개를 통성명의 첫 단계로 채택하는 소통방식이 만국 공통이라는 지적은 아주 틀리지 않다. 한국은 소개된 나이와 사회적 지위가 이후의 모든 교류에서 소통 참여자의 정체성을 ‘형과 동생’ 또는 ‘선임과 후임’으로 재규정해 각자 기대되는 역할에 맞게 철저히 대응할 것을 강력히 주문하고 있다는 데서 독보적이다. 특히 통성명에서 나이 소개를 생략할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형과 동생의 소통은 동등한 개인과의 그것과 동일하기 어렵다. 한쪽이 매번 존댓말로 응해야 한다면 더욱 그렇다. 소통의 내용 전에 형식이 자유로운 분출을 억제하는 데 일조한다. 선임과 후임 간의 소통은 더 복잡하다. 사회적 지위는 사적인 관계를 넘어 공적인 관계를 전제한다. 소통방식이 더욱 경직된다. 할 것과 하지 말 것에 대한 강요된 집착이 소통의 내용과 형식 모두 왜곡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의전서열에 따른 자리 배치나 발언권을 상기하는 건 미시적 우려다. 그보다 소통의 종착점에서 잉태되는 새로운 결론이 절대 지위로부터 무오류의 갑옷을 덮어쓴 채 하달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소통하지 못하는 집단은 사회의 결단력을 갉아먹고 구성원의 결속력을 와해시킨다. 관계 악화로 더 빈번하게 귀결되는 한국 사회의 ‘야자타임’은 파국으로 치닫는 ‘압박된 교통’의 민낯이다. 적시에 친절하게 배출되지 못한 소통 욕구는 나중에 불쾌하게 배설될 뿐이다. 진보보다는 퇴보를 유도하는 병리적 현상 앞에 침묵은 소통경화(硬化)를 이끈다. 적시에 경직된 소통의 줄기를 풀어야 한다. 나중에 결속의 매듭이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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