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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6.16 17:33 수정 : 2016.06.16 21:08

5월17일 오전 1시 서울 강남역, 28일 오후 5시 서울 구의역. 2주도 안 되는 사이에 23살 여성과 19살 남성이 희생되었다. 여성 등 약자에 대한 범죄와 비정규직 용역업체 직원의 죽음은 안전사회에 대한 경종은 물론 열악한 사회안전망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이들에 대한 ‘포스트잇 추모’는 과거보다 훨씬 일상에 불안감을 느끼게 된 시민이 서로 공감하며 사고에 공분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벌써 어김없이 들리는 소리가 있다. “이제 그만 좀… 지겹다.” 추모해보아야 사회가 달라질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굳이 괴로운 상황을 기억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쌓이면서다. 피해자의 삶은 트라우마가 생기며 전반적인 틀이 깨져버렸는데, 마치 아픔을 스트레스마냥 딛고 일어설 것을 당부한다. 재난과 재앙이 많아지면서 갈등과 트라우마가 양산되고 있지만, 아픈 이들을 이해하려는 섬세한 노력은 지속적이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울고, 분노하고, 외치고, 기도할 수 있을 만한 애도의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으면 좋겠다. 바쁘다는 이유로 수수방관할 때 추모는 ‘미완’으로 끝나버린다. 수만 가지 ‘공감’의 국화꽃이 놓였다 해도 피해자의 상실감은 되돌릴 수 없다. 그렇기에 진정한 추모는 피해자가 더 많은 감정을 드러내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옆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격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해서 희생자의 명예가 회복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트라우마는 외인성 질환으로, 외적 사건이 근본 원인이기에 분노와 억울함의 진원부터 먼저 찾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곧 사고에 대한 진상이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함을 이른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의 목소리는 정치적이라기보다, 본인들이 하루빨리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치유’해달라는 몸부림에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대상화하여 보는 일부 정치인은 피해자의 고통을 특정 목적에 활용하려는 경우가 있으며, 이는 문제의 본질을 왜곡시켜 사회를 더욱 병들게 한다.

이러한 방향으로 귀결된 것이 대표적으로 세월호 참사와 태안 해병대캠프 사고 등 학생 안전사고의 사후 수습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자식을 잃었으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국회에 가서 싸워야 하고, 누군가의 막말에도 대처해야 한다. 자식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해결하는 것만 해도 벅찬데, 비뚤어진 시선과 오해에 대응하느라 자신의 아픔을 돌보지도 못한다. 피해자 치유를 위해 노력해야 할 국가는 계속된 재앙 속에 책임의식을 잃어버렸다. 사고가 단순한 불운이 아니라, 욕심과 어리석음이 빚은 구조적인 부조리가 결합하여 발생한 것임을 용기 있게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나도 겪을 수 있는 일이라며 공감하는 시민부터 용감히 일어서야 한다. 얼굴도 모르는 이의 친구와 이웃이 되어 공동체적 상처를 함께 견뎌야 한다. 그 과정은 인간으로서의 고통과 존엄, 서로의 삶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희망만 있으면 행복의 싹은 그곳에서 움튼다’는 괴테의 명언을 믿고 싶다.

정성윤 고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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