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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불투명한 사법절차가 ‘전관 비리’ 키운다 / 정우람 |
변호사 출신 작가 존 그리셤의 소설 <레인메이커>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주인공은 지방대 로스쿨을 갓 졸업한 신출내기 변호사입니다. 그는 법정에서 상대방이 선임한 거대 로펌 소속 변호사와 마주칩니다. 판사는 이들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들이고, 상대측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합의를 종용하기 시작합니다. 주인공은 당황합니다. 판사와 그 변호사가 예일대 로스쿨에서 함께 수학한 막역한 사이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뾰로통한 모습으로 돌아온 주인공에게 사무장이 말합니다.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는 힘들 거야. 합의금을 받고 튀자. 그게 상책이야.”
우리에게 별반 낯설지 않은 이 광경은 불행하게도 법조계의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법조계가 추구하는 이익의 핵심이 인맥 카르텔의 보전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법조 엘리트들 사이의 공고한 카르텔은 법률시장을 주도하는, 그리고 이에 의존하는 세력들에게 가장 확실한 이익창출수단을 보장합니다. “당신 사건은 전관이 맡지 않으면 가망이 없다”는 사무장들의 고정된 레퍼토리는 그 비루한 시스템의 작동 원리와 함께 전관예우의 병폐를 지탱하는 사법절차의 구조적 맹점을 노출합니다.
사법절차는 일반 통념과 달리 진실규명을 담보하는 체계가 아닙니다. 법에서 인용되는 “실체적 진실”이란 판사의 자의적인 판단과 결정으로 사후 재창출되는 진실을 말할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거짓이 충분히 진실을 이길 수 있고, 당사자는 그 여지만으로 해당 기관들의 자비와 관용을 구걸해야 하는 철저한 종속관계에 얽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법조시장은 바로 이 틈새를 교묘하게 파고듭니다. 진실 판정의 두려움을 돈으로 환원시키는 무자비한 시장원리 앞에서 당사자의 곤궁은 약탈과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특정 계층의 부도덕한 반칙이던 전관예우가 법률소비자 모두를 옭아매는 광범위한 거미줄로 증식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결국 투명성입니다. 진실확증절차를 학연과 인맥의 음지로부터 상식과 논리가 지배하는 투명의 양지로 되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는 법언이 있듯 불투명성의 타파는 판결문 기재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기소, 불기소, 판결 등에 대한 결론을 일반 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상식과 논리의 언어로 입증할 의무를 부과하는 것입니다. 그 체계 아래에서 “갑제 몇호증에 비추어 믿지 아니한다”와 같은 유령 같은 논법은 더 이상 수용될 수 없습니다. 갑제 몇호증이 무엇이고, 그것이 왜, 어떻게 부정의 심증으로 이어지는지를 육하원칙에 따라 방어할 책임이 사법권력에 귀속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공헌에 이바지”했다거나, “반성하는 여지를 참작”한다는 식의 불명확한 반증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판결문의 음침한 여백이 상식과 논리의 빛으로 채워지는 만큼 전관예우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할 여지는 그만큼 줄어들 수 있습니다.
투명성의 범위는 다양성을 통해 확장됩니다. 다수결이 가능한 최소 세 명 이상의 법관이 각자의 독립된 판결을 확립하여 경합하는 최종심의 시스템을 원심을 포함한 사법체계 전반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견의 합치 또는 충돌은 민주적 절차를 통한 진실규명의 보다 합리적인 확증 방식으로 발전될 수 있습니다. 법관기피제도의 적극적인 활용 역시 간과돼선 안 될 부분입니다. 사건 관계자들과의 학연, 친분관계 등을 법관 스스로가 밝히도록 의무화하여 부정한 영향력이 재판부에 도달할 여지를 사전 차단하는 원칙을 뿌리내려야 합니다. 어두운 밀실에서 거래되던 비루한 영향력의 실체를 상식과 논리의 양지로 되돌릴 때 비로소 전관비리의 망령은 스스로 사멸할 수 있습니다.
정우람 미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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