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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5.12 20:46 수정 : 2016.05.12 20:46

“저에게 실형 1년6개월을 선고해주십시오.”

2002년 1월, 당시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부장판사로 있던 박시환 전 대법관은 자신에게 실형을 선고해달라는 황당한 요청이 담긴 탄원서를 접하였다. 당시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가 한국 사회에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한 시기였고, 이전까지 군에서 집총을 거부해 항명죄로 재판을 받던 여호와의증인을 비롯한 병역거부자들은 그 무렵부터 아예 입대를 거부하고 민간법원에서 재판을 받기 시작했다. 현행법상 1년6월 이상의 징역형을 받고 복역하면 징집이 면제된다. 징역 1년6월을 선고해달라는 호소는 재징집을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형을 선고해달라는 다른 의미의 선처 요구였던 것이다.

매년 수백명이 종교나 신념상의 이유로 감옥에 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 적잖은 충격을 안겨줬다.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병역거부자의 감옥행을 끝내기 위해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라는 요구가 꾸준히 제기되기 시작했다. 결국 2007년, 문제가 공론화된 지 7년 만에 정부는 ‘전과자를 양산하는 현 제도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개선할 현실적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며 대체복무제 도입 계획을 발표했다. 문제가 일단락되었다는 안도감도 잠시, 이듬해인 2008년 말, 국방부는 돌연 ‘대체복무제 허용은 아직 시기상조’라며 기존 입장을 번복했다. 병무청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국민적 합의가 부족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대체복무제 도입에 관한 정부의 입장은 그날 이후로 한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 사이 정부가 한 일이라곤 두 차례 더 여론조사를 실시한 것이 전부인 듯했다. 국내외에서 대체복무제 도입 요구가 반복될 때마다 정부는 고장난 라디오처럼 ‘국민적 공감대가 부족하다’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유엔 자유권위원회가 병역거부자를 수감하는 것은 자의적 구금에 해당하며 자유권규약을 위반한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을 때도, 유엔 인권이사회 국가별정례인권검토(UPR)에서 복수의 국가들로부터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라는 권고를 받았을 때에도, 한국 정부가 내놓은 답변은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병역거부자에 대한 사법부의 태도다. 더 이상 병역거부자들은 “실형 1년6월”을 선고해달라고 호소할 필요가 없다. 병역거부자들에게 징역 1년6월을 선고하는 것은 전국 각급 법원에서 암묵적인 관행으로 굳어졌다. 행정부가 게으름을 피우는 사이 사법부 내에서는 나름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병역거부자실형 1년6월’의 공식이 생겨났다.

대다수의 국민이 대체복무제 도입에 반대한다는 정부의 주장도 다시 한번 곱씹어볼 여지가 있다. 국제앰네스티가 최근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을 맞아 한국갤럽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72%는 병역거부를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여기고 있지만 병역거부자를 감옥에 보내는 대신 대체복무를 허용하자는 데에 70%가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애초에 인권의 문제를 다수결로 결정해서도 안 되겠지만, 적어도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감옥행이 중단되어야 한다는 데에 국민적 공감대가 있다는 이야기다.

정부가 제도 도입을 전면 백지화하고 8년이 흐르는 동안 어림잡아 5천여명의 젊은이들이 병역을 거부하고 감옥에 다녀왔고, 출감 이후에도 그들의 삶은 장애물투성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최소 540명의 병역거부자가 감옥에 갇혀 있다. 언제까지 이 젊은이들을 감옥에 보내야 하는가? 답은 명쾌하고 남은 것은 결단뿐이다.

김희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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