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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학생부 강화는 기회인가 위기인가 / 채창수 |
<한겨레>의 기획연재 ‘학생부의 배신’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학생부 종합전형의 제도적인 불합리성과 학교 구성원들에게 부과되는 피로감에 대해 고민하는 인문계 고교의 교사로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대안에 대한 논의에서는 학종이 가진 긍정적인 부분까지 놓칠 수는 없으니, 제도를 개선하고 삼각산고처럼 공교육을 정상화시켜야 한다는 방향으로 정리되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해서 현장에서 느끼는 문제점과 대안 논의에서 간과되는 부분을 지적하고 싶다.
‘죽음의 트라이앵글’, ‘죽음의 헥사곤’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숱한 입시제도 개혁이 교육을 정상화시키고 아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진행되기보다 오히려 새로운 변종 사교육을 유발하고 고통만 가중시키는 것은 사회경제적 개혁, 즉 임금격차 해소와 복지 강화 없이 교육 개혁만으로는 교육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차선책을 고르는 조건은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 어떠한 입시제도가 아이들의 고통을 가장 줄여줄 수 있는가! 중고 시절 경험을 떠올려보면 부담을 적게 주는 시험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둘째, 교육에서 계층 간 이동의 폭을 최대한 넓히는 입시제도는 무엇인가! 현재 입시제도는 이 두 가지 조건에서 모두 최악이다. 성급하게 수능 정시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학종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야겠지만, 그것에 우선하는 차선의 조건을 잊지 말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학종을 궁극적 대안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몇 가지 지적하고 싶다. 입시제도는 최종단계에선 순위를 매기는 것이 목적이다. 모든 고등학생들이 삼각산고와 같은 좋은 교육을 받고 생활기록부(생기부)가 풍성해지면 현재 입시 제도의 문제점이 해결될까? 학종에서는 대학이 원하는, 또는 높게 평가하는 스펙이나 서술이 존재하고, 그것을 계발해서 다른 학교 또는 학생과 차별화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어떤 학교가 입시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소문이 나면 지방 학교들은 뒤늦게 그 유행을 좇아 노력한다. 어느 정도 따라가면 입시 선도학교들은 또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낸다. 학종이 입시의 중심에 있는 한 고교 간 격차와 생기부 내용의 끊임없는 경쟁이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학생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교육이 아니라, 학생의 성취 과정을 그럴듯하게 적어서 대학에 합격시키는 것이 목적인 이상 그러한 교육 또한 정상적인 교육일 수 없다.
게다가 학생의 지적 발달 과정에 대한 언어적 재현이 객관적일 수 있는가? 그것이 전형자료로서 합격과 불합격을 결정하는 석차를 매기는 대상이 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삼각산고의 사례에서 학생들의 토론을 녹음해 출퇴근길에 들으면서 생기부에 적어준다는 교사의 사례를 읽고, 해당 교사의 노력이 소중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기괴한 교육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어떤 제도를 통해서 학교 현장을 살릴 수 있다는 어설픈 이상주의가 아이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노무현 정부의 교육개혁이 죽음의 트라이앵글을 만들었고,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대입개혁에 대한 진보진영의 침묵, 또는 동의도 지금의 현실에 일정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강준만 교수는 대학 입시가 한국에서 가장 치열한 계급투쟁의 현장이라고 지적하였다. 입시제도는 특정 계층에 유불리가 분명한 계급투쟁의 산물이다. 학종 체제를 강화하려는 보수정권과 기득권층의 시도에 대해 좀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채창수 전북 완주군 구이면 평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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