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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3.31 19:26 수정 : 2016.03.31 19:56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사람은 죽음을 체험할 수 없다.” 20세기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관한 그의 명제가 사실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음을 체험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지극히 삶의 사건이고, 체험될 수 있다면 우리가 바라보는 삶의 지평 역시 크게 달라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문학은 세상을 비추는 유용한 도구이자 거울입니다. 우리는 문학의 한 구절을 빌려 죽음이 “건네는 말에 대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는 은유적 정의에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지닌 생물학적 의미의 종말을 넘어, 우리가 이 생애에서 절실히 사랑했던 것들과의 영원한 이별을 토로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뜻매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별에 내재하는 필연적 재앙, 즉 그리움을 두려워하며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인지도 모릅니다. 그리움은 회한의 감정입니다. 연인, 부부,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이 끊어지고 다시는 이를 복구할 수 없는 비극적인 무력감은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인지도 모릅니다. 봄바람처럼 설레던 속삭임, 어머니의 손길이 깃든 도시락, 아무런 이유 없이 주어지던 아이의 웃음은 철저히 기억과 과거의 영역 속으로 폐쇄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과의 이별은 그래서 오직 그 화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절망이자, 타인의 공감으로부터 배제된 지극히 외로운 발걸음입니다. 우리는 그리움처럼 사람을 내면으로부터 완벽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 감정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움의 상처가 깊을수록, 그 여정이 고독하고 외로울수록 우리는 그리움의 모습이 죽음과 닮아 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죽지 않고 죽음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사람은 영혼이 소진된 상태에서 비로소 죽음이라는 절대적 존재와 마주칠 수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죽음이 저지른 패악을 저주하고, 이를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서러워하면서도, 다시금 그리움의 힘에 기대어 죽음 앞으로 나아가 우뚝 섭니다. 그렇게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마다지 않는 사람은, 사랑은, 조금씩이나마 그렇게 죽음을 넘어설 수 있게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래서 두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미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그들이기에 더 이상 잃을 것도, 두려울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다시는 그리움 없이 살 수 없지만 다시금 그리움에 기대어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온갖 오해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꿋꿋이 삶의 실낱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는 그리움입니다. 그리움은 사랑이 떠나간 이후에 찾아오는 회한의 굴레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 생애에서 가장 소중했던 사랑으로만 완성될 수 있었던 궁극의 슬픔이자 아픔, 아니 행복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그리움으로 인해 죽음마저 굴복시킬 수 없는 인간의 위대한 저항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그 길은, 각자의 삶에서 가장 사랑했던, 소중했던 기억들을 품은 그리움이 있기에 견딜 수 있는 축복의 고행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정우람 미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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