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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베를린에서 떠올린 개성공단 / 임하영 |
‘우리가 만약 평양의 반쪽을 가지고 있다면 통일이 좀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지난여름 독일 베를린 중앙역에 앉아 이런 상상에 잠겼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지만, 베를린에서는 비슷한 일이 실제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사연은 이렇다. 1945년 2월, 연합군 지도자들은 얄타에 모여 독일의 패전과 전후 처리에 대해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독일 영토는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국이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이 세워졌고, 수도 베를린도 같은 운명을 맞아 네 조각으로 쪼개졌다. 당시만 해도 독일 주민들은 이 네 국가의 관할지를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다는데, 북한은 물론이고 남한 북쪽에 그어진 민통선도 넘을 수 없는 나에게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상황이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은 1961년. 동독과 서독의 경제격차가 벌어지며 동독 주민들이 대거 서독으로 이탈하자, 체제 붕괴의 위기에 직면한 동독 정부는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이에 장벽을 건설하는 동시에 동·서독 간의 국경에는 철조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냉전은 더욱 심화되었고, 공산진영과 자유진영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굳게 가로막힌 장벽에도 조그만 틈은 있었다. 1957년부터 1966년까지 서베를린 시장으로 재임한 빌리 브란트는 동쪽과의 협상을 통해 통행증 제도를 만들었고, 이를 통해 총 120만명의 서베를린 시민들이 동베를린을 방문할 수 있었다. 동독 국민들은 서베를린에서 송출되는 티브이를 빠짐없이 시청했고, 종종 서독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며 바깥세상을 접했다. 이렇게 시작된 교류의 폭이 넓어지며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이는 1990년 동·서독의 통일로 이어졌다.
나는 한국에 서베를린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다 우리에겐 개성이 있음을 떠올렸다. 남·북 교류의 거의 유일한 장인 개성공단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베를린을 뛰어넘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베를린에서 동·서독이 적대적으로 공존했다면 개성에서 남·북한은 우호적으로 공존했고, 베를린이 역사의 곡절로 그리 모양을 이루었다면, 개성공단은 우리가 직접 우리의 의지로 빚어낸 획시대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2016년의 대한민국에선 역사가 거꾸로 흐르는 듯하다. 개성공단은 패쇠되었고 육로는 차단되었다. 사람들의 교류가 중단되었고, 개성에 다시 군부대가 배치된다는 이야기마저 나오고 있다. 이제 공존의 장은 사라지고 대결의 장이 펼쳐졌다. 독일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교류를 확대해가도 통일은 쉽지 않을 터인데 그 최전선이 사라진 상황에서 ‘통일대박’만큼 허황된 구절은 없어 보인다. 우리의 서베를린은 어떤 운명을 맞을는지 안타까움이 깊어간다.
임하영 청소년, 경기 파주시 매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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