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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나와 그의 말이 조악할 수밖에 없는 이유 / 여성국 |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가 한창 논란이 되던 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많은 이들이 수능 역사과목 출제 오류를 우려했다. 의도적인 출제 오류를 통해 궁색한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그럴듯해 보이는 근거 하나를 추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반대하지만, 의도적 출제 오류는 기우이며 음모론적 노파심이라고 여겼다. 수능은 끝이 났고, 역사 과목 출제 오류는 없었다.
설날 이전, 인천공항에 관한 뉴스들이 쏟아졌다. 중국인·베트남인들의 무단 입국, 화장실에 설치된 가짜로 밝혀진 폭발물에 관한 보도들이었다. 보안시스템과 공항 관리에 관한 지적들이 덧붙었다. 명절에도 인천공항의 입국·검역이 불안하다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그 무렵 어떤 자리에서 나는 ‘조만간 인천공항 민영화 말이 또 나오는 거 아냐’라고 내뱉었다. 실없이 뱉고 보니 정황도 근거도 빈약하고, 그저 음모론적 판단처럼 느껴졌다.
개성공단 폐쇄 결정이 내려졌다. 오래전 술자리에서 거나해진 누군가 ‘선거 전에 북한이 뭐 하면 개성공단도 폐쇄하겠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땐 조악하다 여겼던 그 말에서, 문득 음모론적 노파심도 지금 여기를 사는 이들에게 일종의 방어기제처럼 작동하는 것이고, 작동할 수밖에 없는 사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10월 <마션>과 <리바이어던>이라는 영화를 잇따라 보았다. <마션>의 주인공, 화성에 홀로 남겨진 과학자 마크 와트니는 버티고 버텨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다. 이 영화를 보고 대중들은 긍정의 자세와 인간 의지의 위대함을 읽었다고 한다. <리바이어던>은 어쩌면 정반대의 영화다. 부패한 관료와 권력과 시스템, 부조리가 어떻게 평범한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지 낱낱이 보여준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콜랴에게 판사가 판결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주는 장면인데-아주 빠르게, 숨이 막히게 읽어준다-콜랴의 삶은 그렇게 ‘합법적으로’ 무너지게 된다.
두 영화를 보고 나서, 부패한 정부와 권력보다 차라리 화성에 혼자 있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콜랴는 정비공이고, 마크는 과학자이기 때문에, 콜랴는 충동적이고, 마크는 신중하기 때문에, 콜랴는 절망하고 분노하고 무너지는 것이고, 마크는 인내하고 긍정하며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일까. 콜랴가 사는 세상은 너무 부조리하고, 마크가 사는 세상은 이상적이다. 비겁한 통치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비겁한 국가에서 긍정하고 의지를 갖는 것보다 화성에서 상황을 낙관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 아닐까.
<씨네21>에 실린 <마션>에 관한 글에서 김혜리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인이 희망을 잃지 않고 계속 노력할 수 있는 상태는, 당사자의 의지와 태도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사회에 대한 기본적 신뢰가 희망과 의욕의 토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사회를 사는 그와 나는 조악한 말들을 뱉고, 방어기제로 음모론적 노파심을 달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음모론이라고 생각한 궁색한 것들이 현실이 되지 말란 법이 없으니.
여성국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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