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5.10.19 19:03 수정 : 2015.10.19 19:03

남재희 선생님이 지난 10월8일치 <한겨레>에 ‘야당 중도화몰이를 경계한다’는 제목의 특별기고를 해주셨다. 선생님은 계간지 <황해문화>에 특집으로 실린 글 중 ‘중도수렴의 확대 경향성과 그 과제’(채진원)를 아주 꼼꼼히 비평해주셨다. 선생님의 요지는 두가지다. 첫째 “한국 정치는 중도화가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지금 대폭적인 개혁정책이 절실한 때가 아닌가?” 둘째, 결국 당신이 말하는 “중도화란 많은 경우 진보적·개혁적 입장에서 보수화로 가는 중간기착지”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반론을 하면 다음과 같다.

채진원은 글에서 우리 사회의 “정치적 양극화”와 “경제적 양극화”를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위기 현상”으로, 그 실체를 “여야의 과두화”로 인식한다. 특히, 그는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진보정당 등 주요 정당들이 비정규직과 중소하청의 노동자 등 빈곤층으로 전락한 중산층과 중도층을 과소 대표하면서, 상대적으로 상위소득 1%의 재벌과 부자 등 상층자본과 상위소득 9%에 포함되는 민주화 세력, 민주노총, 전교조, 공무원노조,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등 상층 노동자를 과대 대표해왔다”며 ‘과두화’의 문제를 제기한다. 선생님은, 당연히 과두화 문제를 제기하면 더 급진적인 개혁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중도화를 주장하는 건 모순이라 비판한다.

하지만 대폭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유권자 지지 확보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이 전제돼야 하는 ‘권력변수’를 고려하면, 꼭 모순은 아니다. 채진원은 진보든 보수든 집권을 위해서는 ‘보수의 좌클릭’ ‘진보의 우클릭’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특히, 그는 야당이 집권하기 위해서는 진보좌파층만을 과대 대표하거나 경제적으로 상위 9%의 상층노동만을 과대 대표할 게 아니라 중도·무당파층과 함께 비정규직과 빈곤층으로 전락한 중산층을 포괄적으로 대변하는 ‘포괄적 국민정당’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그는 대폭적인 개혁을 위해라도 우선 유권자의 지지와 동의에 기반해 선거에서 승리해야 하며, 원숙한 국정운영을 통해 강고한 지지 기반을 구축할 수 있을 때 성공적인 개혁이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채진원이 말하는 ‘중도화’ 혹은 ‘중도수렴론’은 단순한 진보와 보수 사이의 중간적인 타협이나 기회주의적 중립이 아니라 개혁을 위해 요구되는 “유권자의 지지 획득과 집권 전략으로서 중도주의”다. 지난 18대 대선에서 드러난 우리나라 유권자층의 지지 구도는 대략 51(새누리) 대 49(새정치)다. 이 격차는 매우 작은 것으로, 클 때는 60 대 40이 기본이다. 지구화, 정보화, 후기산업화, 탈냉전이라는 전환기적 시대 상황은 보수 대 진보, 혹은 민주 대 반민주라는 진영논리가 더 이상 통하지 않도록 타격을 가하고 있다. 이것은 이슈에 따라 선택을 바꾸는 ‘상충적 유권자’의 등장 그리고 중도와 무당파의 등장으로도 확인된다.

물론 선거구가 작은 총선에서는 어느 정도 진영논리가 통한다. 하지만 국민 전체를 상대로 한 대선에서의 진영논리 전략은 필패로 통한다. 보수 지지층을 51% 이상 동원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던 박근혜 후보도 승리를 위해 ‘트라이앵귤레이션’(새로운 중도층을 만들기 위한 삼각화 전략)을 활용했고,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선점하려고 했다. 우월적 위치에 있는 박근혜 후보도 승리하기 위해 ‘중도수렴 전략’을 펼쳤는데, 진보진영이 진영논리로만 과연 선거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이탈리아 혁명가 그람시는 레닌의 ‘전위정당’ 개념과 ‘폭력혁명’ 모델을 세계혁명 모델로 일반화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선진사회에서는 부르주아가 민주주의라는 방식으로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았던 것처럼, 진보진영은 대중에 대한 지적·도덕적·정치문화적 헤게모니 전략에 따라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면서 지배할 수 있는 힘(진지전과 대항적 헤게모니 능력)을 획득할 때 집권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측면에서 중도주의는 그람시가 말한 ‘집권을 위한 헤게모니 전략’에 가깝다. 당연히 ‘헤게모니 전략으로서 중도주의’는 선생님의 우려대로, 보수로 귀결되는 중간기착지나 애매한 기회주의적 절충과도 분명 다르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비교정치학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