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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3.09 19:26 수정 : 2015.03.09 19:26

4년 전 이맘때 거대한 쓰나미가 후쿠시마를 덮쳤다. 진도 9.0의 지진이 일으킨 쓰나미 앞에서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결국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 그 위기의 순간들을 보기 위해 텔레비전 중계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만일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격납고 뚜껑이 날아갈 정도의 폭발이 일어난다면 내가 살고 있는 서울도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핵에 오염된 공기 속을 바람에 밀려 떠돌게 될 핵먼지, 핵구름 속에서 만들어진 핵빗방울, 밥이며 반찬에 가득 채워질 세슘들을 상상하고 있는데 내 안에 있던 세개의 기억이 떠올랐다.

첫번째는 1989년 여름, 영광원자력발전소의 일용직 노동자가 아기를 낳았는데 ‘뇌가 없는 아기’, 즉 무뇌아를 낳았다는 기사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 기사를 보고 즉시 행장을 꾸려 영광으로 갔다. 영광 핵발전소 근방에서 며칠 동안 숙식을 하며 취재에 나섰다. 나의 관심은 ‘무뇌아’가 아니라 핵발전소 근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었다. 그 취재를 바탕으로 월간 <말>에 중편소설 <겨울꽃>을 연재했다. 26년 전에 한국 최초로 핵발전소의 핵폐기물이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살펴본 반핵소설 <겨울꽃>은 그렇게 탄생했다.

두번째는 1990년 봄의 기억이다. 주병진과 왕영은이 진행하는 아침 생방송(문화방송)에 출연했었다. 그날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날이었다. 담당 피디와 함께 히로시마 원폭 한국인 피해자들의 후손들을 찾아다니며 피폭이 유전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촬영하고 인터뷰도 했다.

“핵발전소가 그토록 안전하다면, 여의도에 지읍시다.”

내가 이 말을 할 때 왕영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때 방송에서 했던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유효기간이 지난 월성과 고리의 핵발전소를 재가동하겠다면, 당장 여의도로 옮겨와 재가동해야만 한다. 월성 1호기가 그토록 안전하다면 재가동에 찬성표를 던진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들은 거주지를 월성으로 옮기시길 권유한다.

세번째는 1998년 여름 베를린에서 만난 의사 미하엘이다. 미하엘은 체르노빌에서 사고가 났을 때 독일의 다른 의사들과 함께 체르노빌 현장을 방문한 의사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를 처음 본 순간, 그가 문둥병에 걸린 줄 알았다. 체르노빌을 방문했을 때 조금이나마 몸에 피폭을 실험했다는 말을 나중에 듣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미하엘의 머리카락은 두어개만 남았을 정도로 다 빠졌고 몸의 여기저기는 다림질을 한 것만 같은 켈로이드 자국이 선명했다. 미셀은 ‘핵 없는 세상’을 꿈꾸는 의사였다.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자그마한 폭발을 일으키던 4년 전, 나는 일본 관료주의와 핵발전소의 신화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사실 나는 은연중에 일본의 관료주의를 믿고 있었다. 그들은 히로뽕을 투약하고 근무하는 핵발전소 직원도 없었으며 실험을 조작해 정품이 아닌 부품을 10년 넘게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문제가 발생하는 순간부터 국민을 속였다. 일본이 그러할진대 하물며 한국은 어떨까 싶었다.

정도상 소설가
나는 올해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직접 경험하고자 한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둘러보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예정이다. 중편소설 <겨울꽃>에서 나는 피폭이 된다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디엔에이가 교란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주인공의 출산을 통해 이야기했다. 피폭은 곧 세포의 죽음을 의미했다. 핵발전소의 문제는 결국 디엔에이의 교란의 문제일 테니까 말이다. 디엔에이 교란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서 세포가 죽어가고 디엔에이가 교란된 생명들을 만나고자 한다. 그 만남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의 존엄을 담아내는 한편의 소설이 될 것이다.

정도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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