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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30 18:23 수정 : 2005.09.30 18:23

왜냐면

원어민이라는 말도 희극이다. 아마도 흑인이나 한국계 미국인이 이 원어민이라는 말의 기의(記意)에서 제외될 가능성은 100퍼센트일 것이다.

일제는 한국을 병탄한 지 27년이 지난 1937년에 중등학교 조선어 교과목을 없애면서 정식으로 조선어 사용을 금하는 정책을 강제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관한 이어령 선생의 ‘광복 60년 기념 대담’ 내용에서 증언하고 있는 초등학교 아이들 일본어 길들이기 이야기는 가히 희극적이다.

근래 들어 이 나라 지식 분자들 사이에서 영어 공용론이 심심찮게 겉으로 드러나곤 하는 판인데 이것도 가히 희극적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미군이 이 나라에 주둔한 지 어느덧 60여 년이 되었고 이 나라 지식인들 상당수가 미국에서 공부하여 그 지식 바이러스 숙주들은 각종 다른 숙주들을 찾아 눈을 번뜩이는 시대이니 이 나라에서 영어 공용론이 나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1096년부터 1260년까지 두 세기 동안 프랑크인들이 십자가를 등에 지고 아랍을 침략하여 무수한 무슬림과 기독교 신자들까지 죽이고 재물을 빼앗던 시절은 물론이고, 1797년 나폴레옹이 166명의 학자들을 거느리고 이집트를 침공하여 수년 동안 이집트 문화재들을 수집하여 자기 나라에 공수하였던 사건이나, 오늘날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바그다드에 입성해 있는 꼴들은 모두 일본이 조선에 침공하여 36년 동안 저지른 악행의 원판이며 복사판이다.

요즘 한국의 유수한 대학교에서는 영어로 강의할 교수 채용을 마치 일류대학의 자랑스런 유세인 듯이 공고한다. 그것도 국문학과에서 한국언어나 한국문학을 가르칠 인재로 영어 강의할 사람 또는 원어민을 뽑겠다고 공고한다. 원어민이라는 말도 희극이다. 그들 인사위원들이 한국의 미국 입양인 가운데 자격이 있는 사람을 뽑겠다고 하는 걸까? 아마도 흑인이나 한국계 미국인이 이 원어민이라는 말의 기의(記意)에서 제외될 가능성은 100퍼센트일 것이다. 백색 미국인의 한국문학 강의 교수라! 이것은 한국사회가 미국군인 60여 년 점령 결과로 나타난 뼈아픈 희극의 극치라 할 만하다.

한국말이 세계 4천여 언어 가운데 최소한 16~19위에 든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언어사용 인구, 재외동포들의 사용 인구, 그 언어 사용자들의 문화 수치, 경제 수치 등 여덟까지 지표를 놓고 평가하면 세계 언어 가운데 우리나라 언어의 지위는 16~19위 사이에 든다는 언어학의 설이 있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별의별 악한 정책을 썼어도 사라지지 않은 한국어와 한글의 뛰어난 과학성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나라를 잃었다 하더라도 제 나라 말을 잃지 않으면 감옥 열쇠를 지닌 것이나 다름없다”는 프랑스어 선생의 말을 듣는 순간 그 문법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는 말이 이 작품의 핵심이고 감동의 중요한 장면이다. 나라를 잃어 보았고 그 말과 글을 빼앗겨 본 어른들이 아직도 살아 있는 이런 시대 한국에서 영어로 그 나라 문학을 강의할 미국인이나 영국인을 뽑겠다고 버젓이 공고하는 대학교 관리자들이나 영어 공용론을 주장하는 지식분자들과 일제 시대에 일어로 글을 쓰면서 황국사관을 퍼뜨리던 지식 밀정들과는 어떻게 다를까?


정현기/연세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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