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9.09 18:14
수정 : 2005.09.09 18:15
왜냐면
우리 사회의 따뜻한 정 문화는 우리의 교실에서 계속 자라나 지구촌의 ‘메말라가는 관계’에 하나의 대안적 미래로 남아야 한다.
지금 우리 미래세대들의 ‘교실’은 부정과 불신, 교육주체 간의 자괴감으로 불안하다. 변화하는 기술이나 지식, 그리고 새로운 세대들의 선호 등은 기존 제도와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다시 공동체의 제도적 삶의 양식으로 재구성된다. 이는 곧 ‘거버넌스’의 전환인데, 이제 교육의 전환은 ‘교실’로부터 그 단초를 찾아야 한다. 거창한 이념과 명분이 갈등하는 사이 교단 앞엔 감시의 제도들만 누더기처럼 늘어나고 있으며, 입시의 ‘병목구간’ 앞에선 우리 ‘교실’은 존경과 보살핌의 언어가 줄어만 가고 있다. 위로부터의 기대는 이제 접어도 될 듯하다.
유교적 거버넌스의 토대인 ‘관계적 신뢰’가 우리 교실에서 옅어지고 있지만, 경쟁과 자율, 다양성과 인간화 교육이 우리 고유의 신뢰 문화와 공존 못할 이유는 없다. 역설적이지만 ‘불신’을 작고 강하게 제도화할 경우 그것은 가능하다. 예컨대 국·영·수 등 중등과정 주요 과목의 평가를 교실 밖으로 넘겨 보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다. 경쟁의 광역화를 통해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식의 교실 메타포로부터 학생들을 해방시키고, 협력이 자신의 경쟁력을 더욱 높인다는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각종 경시대회 형태든, 공공기관 또는 지역 교사들의 공동출제 형식이든 전적으로 학생의 선택으로 놓아두자.
그렇게 되면 이제 교사는 학생들의 ‘교실 밖 경쟁’의 지도자이며, 동시에 ‘교실 안 생활’의 스승이 된다. 긴밀한 관계를 통한 의사소통은 학생의 학습능력, 인성, 적성, 소질, 잠재적 가능성 등을 좀더 용이하게 한다. 학교는 지식도 전달하지만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도 공급하는 기관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사나 학교에 자괴감을 주는 평가와 감시의 누더기 제도들도 더는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차피 교사와 교육의 질은 투명하게 드러날 테니 말이다. ‘찜찜한 관계’가 해소되면 학부모도 학교가 주는 주눅에서 벗어나 투명하고 자발적인 참여와 봉사의 한 주체가 된다.
그 다음은 대학의 몫이다. 교사의 기록을 토대로 대학은 자신의 철학에 맞는 학생을 눈치보지 말고 선발하면 된다. 이젠 입시를 점령하려는 학부모의 ‘극성’을 대학은 권위로 맞서야 한다. 객관성의 강박에 갇혀 변별력 ‘타령’만 하거나 소수점 이하 몇째 자리까지로 자꾸 ‘차이 없는 차이’만을 만드는 것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합격할 수도 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회적 관용의 수준을 넓히는 일과 학벌사회가 가진 ‘마음속의 계층제’를 없애는 일은 그래서 고스란히 대학의 임무다. 대학이 교육으로 경쟁할 때 이게 아마 상향 평준화일 게다.
‘위험사회’로부터 ‘약탈적 공동체’로의 전이를 막는 것은 작고 강한 ‘제도’와 넓고 깊은 ‘관계’의 맥락에서 찾아야 한다. 신뢰와 이웃에 대한 보살핌이 살아 있는 우리 사회의 따뜻한 정 문화는 우리의 교실에서 계속 자라나 지구촌의 ‘메말라가는 관계’에 하나의 대안적 미래로 남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감당치 못해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잊혀진다면 정말 슬프지 않겠는가.
장성희/미국 하와이주립대 미래학센터 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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