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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15 17:45 수정 : 2005.08.15 17:47

왜냐면, 반론-김가영 학생의 ‘그래도 희망은 있다’ 를 읽고

수능 시험을 위한 12년간의 교육은 가장 큰 꿈을 키울 수 있는 학창 시절에, 다양한 사회경험을 통해 삶에 대한 안목을 넓히고 자신의 진정한 적성을 찾아가게 하는 데에 전혀 일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침 6시 기상, 하루 15시간씩 공부한 뒤 새벽 1시쯤 파김치가 되어서야 간신히 취침. 우리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혹은 해외 토픽 기사로 다뤄질 법한 10대의 삶을 살아가는 ‘영광스러운’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이다. 이처럼 눈코뜰새없이 바쁜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에게 시를 수능 문제를 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깊은 전율과 감동을 맛보며 마음으로 감상할 여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아니, 우리를 이미 10여년 동안 옭아매온 이 나라의 주입식 교육이 문학 세계에 대한 10대의 순수한 동경과, 문학작품을 그 자체로 음미하며 감상하는 우리의 정신적 능력을 애초에 박탈해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는, 혹은 문학작품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지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작가의 언어와 독자의 정서의 상호 소통을 통해 진정한 가치가 부여되는 문학작품에서 글 쓴 친구가 언급한 ‘올바른’ 해석을 규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글 쓴 친구는 전쟁의 아픔을 전쟁의 즐거움이라 해석하는 것은 올바른 감상이라 할 수 없다고 지적했지만,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에 입각해볼 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만약 전쟁의 아픔을 나타낸 시를(물론 작가의 의도가 정확히 무엇인지 언어화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읽은 독자가 작품 속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보고 교훈을 얻었다면 그 작품에는 더욱더 독자적이고 심화된 가치가 부여될 것이다. 따라서 만약 수능에서 시를 문제화하는 의도가 학생들이 시를 이해하는 안목을 넓히고 평소 친근하게 접하지 못하는 시를 좀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면, 학교교육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가 어떤 것인지 몇 개의 단어로써 명시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시에 대한 자유로운 감상을 유도하고 그러한 감상을 생활화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수능이라는 부담스러운 시험을 위해 시를 분석하는 방법을 외우도록 하는 것은 도리어 시에 대한 거부감을 일으켜 우리들로 하여금 시를 더 멀리하게 할 뿐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10대로서 우리에게 ‘진정한’ 꿈은 없다. 수능 시험을 위한 12년간의 교육은 가장 큰 꿈을 키울 수 있는 학창 시절에, 다양한 사회경험을 통해 삶에 대한 안목을 넓히고 자신의 진정한 적성을 찾아가게 하는 데에 전혀 일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주위에는 명문대 입학이라는 ‘사회에 의해 강요된’ 꿈 이외에 자신만의 뚜렷한 목표를 갖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친구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 친구들의 이상 역시 한국 교육이라는 틀 안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능성에 무지한, 다소 편협한 시각에 기반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얼마 전 신문을 통해 접한 캐나다의 고3 학생들에 관한 기사는 한국 학생들의 삶과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모습을 보였다. 캐나다에서 학생들에게 방학은 말 그대로 ‘학교로부터 해방되어 쉬는 기간’으로, 학생들은 이 기간을 아르바이트·운동 등의 내면적인 자기계발 활동을 하며 보낸다고 하였다. 학창 시절, 물론 지식의 축적도 중요하지만, 이처럼 사회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삶의 지혜를 몸으로 배우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꿈을 찾고 실현해 나가는 데 있어 책 한 권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의 몇 배 이상으로 소중한 재산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공부 잘하는’ 학생만 최고로 여기는 학교에서 대다수의 학생들이 ‘공부 잘해야’ 될 수 있는 법관·의사를 최고의 이상으로 여기고 혼신의 힘을 다해 교과서를 외우고 있는 현실에서 나는 묻고 싶다. 우리,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에게 과연 ‘진정한’ 꿈이 있는가. 막연히 명문대 입학,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 돈 잘 버는 직업을 갖는 것이 아닌, 나 자신이 주체적으로 설계한, 내 인생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진정한’ 꿈이 있는가.

김정민/대원외국어고등학교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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