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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12 17:26 수정 : 2005.08.12 17:30

왜냐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깟 몇 문제를 맞건 틀리건, 생각하고 고민하는 우리를 기계라고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감상적인 판단이다.고3 생활은 여러 면에서 고역이긴 하지만, 꿈이 있어서 아름답다.

“나는 대한민국의 고3이다. 나는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즐겁게 공부를 한다.” 거짓말인가? 그렇다, 거짓말이다. 저 말이 사실이라고 당당히 양심선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점수와는 상관없이 진정으로 ‘즐길 줄 아는’ 학생이거나 모의고사 점수가 이미 만점으로 수렴된 학생이리라.

길게 보면 초등학교서부터 11년, 짧게 보면 지난 고등학교 시절 2년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는 첫 시험을 위한 기초학문 수양기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여태껏 닦아온 실력을 발휘할 그 거대한 관문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래서 고3은 슬프다. 아니, 슬퍼야 한다. 몇 년을 공부해 왔는데도 점수가 원하는 만큼 올라주질 않으니까. 파릇파릇한 10대의 마지막마저 고스란히 공부에 바쳐야 한다는 게 억울해지기도 하니까. 칼날같이 예민한 나이라는 이유로, 수능이라는 압박에 시달린다는 이유로, 또한 대한민국 고3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때로 절망의 심연에 빠진다. 그리고 외친다. ‘우리는 수능문제를 푸는 기계가 아니예요’라고.

하지만 단정적으로 말하자.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깟 몇 문제를 맞건 틀리건, 생각하고 고민하는 우리를 기계라고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감상적인 판단이다. 글 쓴 친구처럼, 언어영역 문제가 ‘획일적 사고’를 강요한다는 것을 예로 드는 것은 다르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비문학을 제외한 모든 문학작품은 그것을 수용하는 독자의 입장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 당연하다. 인간은 독자적인 존재로서 그 어느 누구와도 정확히 일치하는 생각을 가질 수 없다. 비슷한 해석이라 할지라도 미묘한 정서의 차이 역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에, 자유로운 수용의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근거’에 따른 ‘작품의 올바른 해석’이다. 예를 들어, 작가의 의도가 전쟁의 아픔을 전달하고자 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작가가 작품 속에 마련해둔 근거를 찾아 자유롭지만 올바른 해석을 해야 한다. 아무리 수용하는 독자의 자유라고는 하지만, 전쟁의 아픔을 전쟁의 즐거움이라 해석하는 것은 수용의 다양성이라고 할 수 없다.

한 가지 더.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이름을 근거로 하여 우리를 석유, 석탄 따위의 자원과 동일시하는 것은 지나친 오류와 비약이다. 석유와 석탄은 ‘물적자원’이고 우리는 ‘인적자원’이다. ‘자원’이라는 단어의 뜻은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까지 포괄한다. 우리가 석유와 석탄 따위와 같은 존재라는 생각은 단어 뜻의 일반적 의미에만 초점을 두고 확대 해석한 오류이다.

우리는 곧 구체적인 꿈을 실현하려고 사회로 나아갈 ‘첫 번째 문’을 두드릴 차례다.‘겨우’ 첫 번째 문이다. 점수가 높든 낮든, 막연한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려는 첫 번째 단계이다. 고3 생활은 여러 면에서 고역이긴 하지만, 꿈이 있어서 아름답다.

김가영/부산 중앙여자 고등학교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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