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05 18:24
수정 : 2005.08.05 18:26
왜냐면
인디밴드 ‘카우치’의 ‘알몸 노출’ 사건은 경찰이 ‘공연음란 및 업무 방해’라는 굵직한 죄명으로 사전구속영장 처리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지금까지 사전모의가 마치 쟁점인 듯 연출하던 대다수 언론은 이제 인디밴드들의 약물 남용으로 내용을 전환하고 있다. 게다가 이 사건을 성의식의 부재와 공영방송의 음란화로 규정하면서 인디밴드 전체에 대한 일반화로 들떠 확장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일부 사람들은 그런 일반화를 경계하며 홍대앞 문화 전체를 성문란 문화로 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알몸 노출이 과연 문제인가?’ 반문하면서 글을 시작하고 싶다.
지금 알몸노출 사건에 대한 비판적 논란 중 가장 핵심적인 개념축은 ‘음란’과 ‘남성 성기 우위’인 것 같다. 우리나라의 판례와 학설은 ‘음란성’을 일반 보통인의 성욕을 자극 또는 흥분케 하여 성적 수치심과 성도덕을 침해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보통인’은 누구이며 기존의 성도덕이 변화하는 성문화 해석의 기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뿐만 아니라 경찰이 카우치 멤버에게 형법 조항 ‘공연음란죄’(성욕을 흥분 또는 만족하게 하는 행위로서 불특정 다수인에게 수치감·혐오감을 주는 행위)를 적용한다고 하지만, 그 대신 경범죄 조항, ‘알몸 노출’을 이 사건에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려를 해봐야 한다. 미국 판례의 경우 ‘음란행위’는 ‘성행위를 명백하게 노골적인 방식으로 묘사 또는 서술’하는 ‘하드 코어’(hard core)적인 요소가 있을 때 인정된다. 즉, 단순히 알몸을 노출하는 행위와 공연음란죄에 속하는 음란성을 구분하고 있다. 카우치의 경우 가학적 성행위의 표현이 없었다는 점에서 단순 경범죄, 알몸 노출을 적용해야 한다.
다음으로 일부 사람들은 카우치의 멤버를 여성에게 알몸을 갑작스럽게 보여주어 여성의 공포감을 통해 권력감을 느끼는 바바리맨과 동일시하면서, 이번 사건을 남성 성기는 자랑스럽게 여기고 여성의 성기는 수치스럽게 여기도록 만드는 ‘남성 성기 우위’의 사회의식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첫째, 카우치는 여성에 국한지어 자신의 알몸을 의도적으로 보여준 것이 아니며 그간 알몸 노출을 통해 관객의 호응을 경험했던 그들의 무분별한 경험 적용에 문제가 있을 뿐이다. 둘째, 알몸노출 사건에 대한 불편함은 성별, 나이를 가리지 않고 기존 성개념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나타냈다. 셋째, 카우치 멤버는 도대체 어떤 권력의 지점을 획득한 것일까. 그들은 비밀리에 알몸 노출을 하여 권력감을 느끼는 바바리맨들과는 다르게 공연장에서 얼굴에 페인팅을 한 채 알몸을 드러냈으며, 그들이 얻은 건 권력이 아니라 형법 적용의 대상이라는 비권력적 자리다.
물론, 그들의 동기가 어떻든지 이 사회에서 여성의 전라와 달리 남성의 알몸 노출이 여성에 대한 공격적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알몸 노출’은 남성권력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 해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여-남 간의 권력관계가 빚어내는 문제라기보다 음란성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성기’에 대한 이 사회의 고리타분한 성관념에 더 많은 연관이 있다고 본다. 여러 문제가 얽혀 있지만 카우치를 변명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작 내가 답답하게 여기는 것은 알몸노출 비판에 대해 인디밴드가 “생방송인지 몰랐어요”, “우리 밴드 아니에요”라는 면피용 대답만 내놓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성기를 음란의 심벌로만 간주하는 진부한 한국 사회의 성관념에 의문을 던지고, 도대체 음란이란 무엇이며 음란의 상징성으로 전락한 성기는 언제 몸의 일부분이 될 수 있는지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야 했다.
이박동건/농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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