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
[왜냐면] 국립대 통합안, 이대로는 안 된다 |
이범 서울시교육청 정책보좌관·교육평론가
대학 평준화에는 두 가지 모델이 있다. 독일은 대학들이 비교적 균등하게 지원받아 수준이 엇비슷하다는 의미에서 평준화다. 학생선발은 대학별·전공별로 내신과 논술형 공인시험 합산 성적으로 한다. 프랑스는 균등지원에 더하여 학생선발까지 공동으로 한다. 논술형 국가고시 성적이 일정 수준이 되면 거주지 주변 어느 대학에든 입학할 수 있다. 국립대 통합안은 학부 학생선발을 공동으로 하므로 프랑스식 평준화와 비슷하다.
문제는 통합국립대의 사회적 평판이다. 대학 서열에는 대학평가서열과 입학성적서열이 있다. 통합 준비기간 3년 동안 아무리 투자해도 국립대의 평균 역량을 급격히 높여 대학평가서열을 끌어올리기는 어렵다. 또한 통합국립대의 입학성적서열은 5위 밖, 심지어 10위 밖일 가능성도 있다. 입학정원이 많으므로 서열을 끌어올리기 힘들고, 명문사립대와 통합국립대에 동시합격한 지원자들의 선택을 예상해 보면 ‘연·고대에 1등 내준다’, ‘하향평준화’ 등의 반응이 허튼소리가 아니다.
첫번째 대안은 기존의 입학성적서열에서 아예 이탈하는 것이다. 수능을 반영하지 않고 유럽의 경우를 참조한 논술형 대학입시를 별도로 시행한다. 그리고 중·고등학교마다 기존 교육과정 학급과 병행하여 통합국립대 입시를 준비하는 ‘혁신학급’들을 설치하고, 지원 학생들에게 역량 중심의 수업(탐구하고 토론하고 글쓰고 발표하는)을 제공하는 것이다. 아울러 인터넷에 혁신학급 담당교사들이 제작·공유·변형·주석하는 수업·평가 콘텐츠 생태계를 구축한다. 웹2.0식 교육과정이다. 교사들은 원하는 콘텐츠를 조합하여 자신만의 교과서를 만들어 인쇄하여 수업하고 평가하며, 그 경험을 피드백한다. 정부에서는 교육과정 목표상 부적합하다고 신고된 것만 심의한다. 초·중·고교 교육혁신을 대폭 확장할 기회이자 교사의 자율성을 높이고 진정한 교권을 회복할 계기이며 대학이 기초교육원을 세워 기본기를 재교육해야 하는 불합리에 대한 처방이다.
두번째 대안은 여러 국공립대에 서울대 못지않게 집중 투자하여 독일식 평준화를 추진하는 것이다. 카이스트와 포항공대 등의 경험을 참조할 수 있다. 지난 2월에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이 발표한 ‘혁신대학’안은 학생선발 방식을 밝히지 않았는데, 이는 독일식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프랑스·독일과 달리 사립대라는 변수를 가진 우리나라는 국립대 평준화의 결과가 프랑스·독일보다는 미국과 유사해질 위험을 예방해야 한다. 아울러 학벌주의가 서울대뿐만 아니라 명문사립대로 인해 타파되기 어려움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니 대학체계 개혁만 할 것이 아니라 ‘학력·학벌 차별 금지법’도 만들어 고용·승진상 차별을 강력히 금지하자. 시류도 우호적이다. 정연주 사장 시절 <한국방송>(KBS)은 공공성을 명분으로 출신 대학을 보지 않고 선발했지만, 지금은 이윤논리에 충실한 삼성이 지방대 출신과 고졸자 채용을 대폭 늘리고 있다.
한국의 학벌주의가 극심했던 이유는 경제성장이 정부 주도로 이뤄졌고 고급 관료를 시험으로 선발했기 때문이다(전세계적으로 희귀한 사례다). 시험을 잘 보는 ‘스카이’ 출신이 정부를 장악하고 민간을 쥐락펴락하니, 기업에서도 이들의 대학 동창을 채용할 이유가 충분했다. 그런데 지금은 경제의 정부 주도성이 약해진 만큼, 기업에서 학벌을 따질 이유가 줄었다. 기업 입장에서 학력·학벌 차별 금지는 이익을 직접 제한하는 초과이익공유제나 공정거래법보다 수용하기 쉽다.
무엇보다 왜 이렇게 여론이 썰렁한지 따져봐야 한다. 대다수 국민들에게 지금의 국립대 통합안은 내용적 설득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의제화 방식도 뜬금없다. 발상을 전환하여, 대학과 학벌을 주제로 국민적 백가쟁명의 축제를 벌여보자. 지역별·단위별로 오프라인 토론과 온라인 논쟁을 기획하여 중계하고, 대권주자들도 여기에 참여하자. 너무나 많은 국민들이 사교육비와 지방대 소외와 학력·학벌 차별로 고통과 설움을 경험해왔기 때문에, 너도나도 한마디씩 내놓게 되고 반응이 적잖을 것이다. 새로운 정책에 대한 국민적 이해도를 높이고, 매도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게 되는 효과도 있다. 그리고 대선후보가 누가 되든 여기서 도출된 결론을 공약으로 삼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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