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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5.21 19:29 수정 : 2012.05.21 19:29

사랑은 정치 기반이 될 수 없어
서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나
당권파 지도부에 묻고 싶다

김만권 뉴욕 뉴스쿨 정치학과 박사과정

통합진보당 사태가 일어나고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에 기고를 했다. 두 기고문에서 주체사상을 믿는 이들이 왜 민주주의자 혹은 진보일 수 없는지에 대해 강조하다 보니 ‘주사파’라는 용어를 불가피하게 썼다. 이 용어를 쓰면서도 맘이 조금은 불편했다. 현 상황에서 주사파라는 말은 ‘당권파’나 ‘자주파’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권파에도 비자주파가 있을 수 있고, 자주파 내에도 주체사상과 거리를 두는 비주사파가 존재한다. 더 맘을 불편하게 한 건 이런 집단의 차이뿐만이 아니었다. 이 집단 안에는 나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개인들이 있다. 중앙위원회 폭력사태로 인해 절정에 다다른 분노 앞에 그 개별적 존재들이 이 용어 하나에 아무런 구별 없이 모두 묶여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더 마음을 다지고 이런 개인들을 소중히 하는 마음으로 당권파를 바라보려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언론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지도부에선 ‘개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집단 속의 개인은 저마다 다른 존재이고, 정치집단에서 개인은 자기만의 다른 견해로 구별이 된다. 하지만 이정희, 이석기, 김미희, 김재연 같은 지도부나 당선자의 발언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부정선거는 없었다”, “사태 해결은 당원총투표로 해야 한다”, “비대위를 인정할 수 없다” 등 ‘당파 이익 지키기’라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될 만큼 한결같았다. 특히 이들 발언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평범한 동료애로는 설명이 안 되는 자파의 당원 동지에 대해 묻어나는 뜨거운 애정이었다. 사회적 소수자로서 어려운 시간을 함께 건너왔기에 우리는 서로 배신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결속이 보였다.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이들은 서로 사랑에 빠져 있는 듯했다.

<인간의 조건>에서 해나 아렌트는 사랑은 정치의 기반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눈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서로를 인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사랑은 관계를 맺는 사람들 사이에 객관적인 거리가 필요한 정치에선 적절한 기반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정치철학자들은 우정(friendship)이 정치의 기반이 돼야 한다고 본다. 우정에는 상대방을 강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정치에선 이 거리로 인해 각자 독특한 견해와 입장을 지닌 구별되는 개인으로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우정을 두고도 우려하는데 정치에선 지나친 우정이 적을 만들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카를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을 적과 동지의 구분으로 본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더 거리가 큰 동료애나 함께 스포츠 경기를 뛰는 팀원의 결속력 정도가 정치에 적합하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우정이든 동료애든 팀원의 결속력이든 정치에는 개별 존재들 사이에 객관적 거리가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나는 똑같은 입장을 내놓고 있는 당권파 지도부 인사들에게 묻고 싶다. 서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두고 있냐고. 너무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서 동지들이 저지른 실수를 덮어주고 싶은 것이 아니냐고. 그렇다면 그 거리 없는 사랑에서 깨어나 동료들이 한 일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라 부탁하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심상정 의원이 설령 비민주적으로 의사를 진행했다 하더라도 그래선 안 됐다고. 그 행위가 결코 폭력을 일으킨 원인이 될 수는 없다고. 그러니 마땅히 우리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 사람이라도 다르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다른 목소리가 있다면 여러분은 더이상 아무런 개별성 없는 집단 속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아끼고 지켜야 할 소중한 한 사람으로 빛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럼에도 무작정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개인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나서서 말할 것이다. “여기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있다고.” 그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똑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소리를 가지고 있음을 믿기 때문이며, 그 다름이야말로 우리가 정치적 존재임을 증명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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