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4.11 21:26
수정 : 2012.04.1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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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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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자살로 끝맺음되는
악순환의 굴레는 계속됐다
그러나 이를 해결하려는
정치인은 보이지 않는다
김선우 서울 경복고 1학년
민의를 대표할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가 치러졌다. 벽에는 선거 포스터가 붙었고 사람마다, 정당마다 제각기 다르면서도 비슷한 정책들을 내놓았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 경제민주화 실현, 탈원전, 관광지구 개발, 골목상권 보호, 불법 민간인 사찰 조사, 부정부패 척결, 정권심판, 복지제도 확립 같은 여러 가지 공약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모든 정당과 후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청소년을 위한’ 정책은 없다는 것이다.
청소년 문제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출발하여 학교폭력, 과도한 학업 스트레스, 사교육 문제, 성적에 따른 차별, 그리고 청소년 자살로 끝맺음되는 이 악순환의 굴레는 계속됐다. 그러나 이를 해결하려는 정치인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학부모의 표를 좀 얻어 보려고 ‘학교폭력 예방교육 실시’ 정도만 내거는 게 전부다.
이것은 과연 교육계에만 국한된 문제일까. 교육계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청년실업 문제, 노동 문제는 그렇게 신경을 쓰면서 왜 청소년 문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가.
어른들이 바라는 세상은 말 안 해도 모두가 이뤄주겠다고 발 벗고 나선다. 그러나 청소년이 바라는 세상은 누구도 들어주지 않으려고 한다. 말하려고 해도 ‘애들 주제에…’라는 편견이 깔린 목소리가 가로막는다. 학생들의 교육을 총괄하는 교육감도 학생이 아닌 어른들이 뽑는다. 교육감도 결국 학부모·교사가 바라는 세상만 이뤄준다. 청소년이 바라는 세상은 실현 불가능한 과제로 남는 것이다.
청소년 참정권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권자는 투표라는 권력을 가진다. 후보자들도 유권자들의 세상을 만들어준다고 하고, 또 만들어주려는 확실한 목표를 가진 후보자가 있다. 청소년이 참정권을 가진다면 어떨까. 후보자들은 청소년들이 가진 ‘투표 권력’을 의식하고 청소년 유권자들을 위해서 청소년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단순히 문제가 되는 것만 깨작깨작 고치고 교육법을 개정한다고 해서 지금 이 교육 현실은 나아지지 않는다. 청춘을 잃고 교실에 갇혀 공부만 하고 그 공부가 평생을 좌우한다. 한 치의 실수도, 성적의 하락도 용납하지 않는다. 발을 조금만 헛디디면 센 급류에 떠내려가는 벼랑 끝 싸움이다.
이러한 교육 현실을 바꾸기 위해선 먼저 청소년들이 참여해야 하고, 그러려면 일단 참여할 여건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애들 주제에?’ ‘청소년들에게 선거권을 주면 부모 하라는 대로 하고 청소년 가치관 확립에 방해가 된다?’ 선거권이 주어지는 만 19살이 된다고 해서 없던 정치의식이 생겨나진 않는다. 정치 참여는 곧 연습이다. 학교의 참정권에 대한 교육도 같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청소년이 바라는 세상은 곧 마음껏 참여할 수 있고, 마음껏 발언할 수 있는 세상이다. 교육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건 어른들의 주먹구구식 개혁이 아닌 청소년의 참여다. 정치는 어른들만의 것이 아니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혹은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것이기도 하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교육감 선거 벽보에 ‘청소년을 위한’ 공약이 쓰여 있고, 청소년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줄 의지를 가진 후보자가 있는, 조금은 먼 미래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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