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1.30 20:21
수정 : 2012.01.30 23:37
선거제도 등 정당의 이해와
직결되는 현안을 의원들에게
일방적으로 맡겨서야 되겠나
19대 총선을 앞두고 구성된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가 공직선거관계법 심사소위원회에서는 석패율제 도입을, 정당·정치자금법 심사소위원회에서는 전당대회 동원비용을 중앙당에서 지급하되 그 비용을 연 1회 국고 부담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정치개혁이라는 본래 취지와 달리, 한나라당과 민주통합당의 공통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를 소수 정당과 시민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추진하는 것이다.
필자는 석패율 제도를 비롯한 정치개혁 현안에 대해서 찬반을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국회의원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특히 거대 정당들의 기득권이 달려 있는 선거법이나 정치자금법 개정 논의를 일방적으로 국회의원들에게, 그것도 의석수를 반영한 위원 구성으로 원내 1·2당의 입장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 정개특위에 맡기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찾아보고자 한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는 2004년 선거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 79개 선거구마다 남녀 1명씩을 추첨해 구성한 시민총회를, 2년 뒤인 2006년에는 인구가 가장 많은 온타리오주에서도 103개 선거구마다 1명씩을 추첨해 구성한 시민총회를 1년 가까이 운영하였다. 당시 이들 주정부의 선거는 득표 순위에서 1등을 한 후보가 당선되는 단순다수대표제로 치러졌기 때문에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수 사이에 상당한 격차가 발생하였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2001년 5월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선거에서 57.6%밖에 얻지 못한 자유당이 79개 의석 중 77석을 획득한 반면, 12.4% 지지를 얻은 녹색당은 한 석도 얻지 못한 사례다. 주정부는 선거제도를 개혁할 필요성에는 공감했지만 당파적 이해와 결부된 의원들에게 맡긴다면 이해관계가 충돌해 제대로 처리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추첨으로 시민총회를 구성해 9개월여 동안 현행 제도의 실태와 각국의 선거제도를 충분히 숙지하게 한 뒤 토론 과정을 거쳐 선거제도를 개선할지, 개선한다면 어떤 제도를 도입할지 권고하게 했던 것이다. 시민총회의 권고는 의회에서 수용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투표에 회부돼 최종 결정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이 두 주에서는 일반 주민투표보다 높은 이중통과 기준 때문에 아깝게 부결됐지만, 중요한 것은 추첨이라는 평등한 참여 수단을 통해 선택된 보통 시민들이 심의와 토론을 바탕으로 비록 권고 수준이더라도 중요한 이슈인 선거제도의 개혁방안 자체를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추첨을 통해 선발하는 시민총회 방식을 정치권의 이해상충이 걸린 사안을 다루는 자문위원회 구성에 활용할 수 있다. 선거구나 정치자금, 의원 정수, 선거제도 등 의원과 정당의 이해와 직결되는 현안에 대해서 현행처럼 의원들로 구성되는 정개특위에 일방적으로 맡기는 것보다 더 건설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각 정당이 추천하는 외부 인사들로 구성되는 자문위원회 역시 자신을 추천한 정당의 입장을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결정 권한까지 부여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시민총회를 자문위원회 형식으로 구성하여 정개특위와 같은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하며, 결정 사항에 대해서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여 처리하도록 한다면 지금처럼 정당들의 밀실 거래나 기득권 고수 차원의 추진을 일정 정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1월부터 무작위로 추첨한 국민들을 재판에 참여시키는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고 있다. 영미권의 배심제와 달리 국민참여재판은 법관이 배심원의 평결에 구속되지 않고 다만 참고하여 판결을 선고하는 방식이지만, 판사 입장에서 배심의 평결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대법원이 시행 2주년을 맞아 분석한 내용을 보면, 배심원의 평결 결과와 최종 판결 결과가 90.6%나 일치하였으며, 항소심에서 파기된 비율은 27.9%로 같은 기간 일반 사건의 원심 파기율 41.5%보다 낮았다. 정치권이 사법개혁 차원에서 국민참여재판을 도입하였다면 정치개혁 차원에서 이해상충 현안에 대해서 자문 구실을 하는 정치개혁배심제를 운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우리 국민들이 투표장에 나가 한 표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들에게 실제 정치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는 실질적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참여를 통해 민주주의에 필요한 자질을 배우고 시민적 덕성을 발달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각 정당이 총선 공약으로 이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기를 기대한다. 이지문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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