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젠 당신의 이야기가
가슴에서 서걱거리지 않아요
그 진심이 온전히 제게
전달이 돼요. 고마워요….’
“~살다 보면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어~그럴 땐 나처럼 소릴 질러봐~꿍따리 샤바라 빠빠빠~” 어라? 이 노랜…. 한 시절을 풍미한 클론의 대히트곡 아닌가! 이런 장소에서 이런 노래가? 서둘러 노래가 흐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본다. 대학생들인가? 젊은 친구 스무명 정도가 흥겨운 음악 소리에 맞춰 군무를 추고 있다. 손이며 다리, 심지어 엉덩이 흔드는 것까지 척척 맞추는 것을 보면 한두 번 췄던 솜씨가 아닌 것 같은데….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오늘을 축하하기라도 하는 듯 새하얗게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뜨거운 열기가 춤을 춘다. 아, 이 얼마 만의 흥겨움인가. 손이 나풀거리고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세 아이를 낳고 미처 꺼지지도 못한 불룩한 배가, 퍼져버린 엉덩이가, 뻣뻣이 굳은 줄로만 알았던 서른여덟 내 몸이 “꿍따리 샤바라~” 하며 어느새 달아오른다. ‘희망텐트촌 1차 집중의 날-와락 크리스마스’의 한 풍경이다.
또 하나. 12월의 마지막 날. 한 해가 끝나는 날, 커다란 석쇠 위에서 목살, 오징어, 돼지 껍데기, 고추장 삼겹살, 버섯, 굴, 심지어 불량식품 쫄쫄이까지 각자의 고유한 향을 내며 군침 돌 만큼 맛나게 구워지고 있다. 그 한편에선 군고구마가 익어가고 고구마 통 아래에선 아이들과 엄마들이 쭈그리고 앉아 ‘달고나’를 성공시키겠다며 애꿎은 설탕만 연신 태우고 있다. 고구마 통을 사이에 두고 뒤편에선 쌍용차 해고자의 아내들이 누군가에게 귀를 쫑긋거리며 서 있고 그 당사자인 쌍용차의 한 조합원은 눈물을 흘리며 가슴속 얘기를 토해내고 있다.
저 앞쪽 행사 무대에선 쌍용차 해고자들이 마이크를 부여잡고 몇시간째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나는 또 즐겁다. 얌전한 줄로만 알았던 쌍용차의 남자들이 콧구멍에 휴지를 끼워 길게 늘어뜨린 채 나풀거리며 춤을 추고, 시커먼 복면을 한 채 양손에 탬버린을 들고 김완선보다 더 섹시하게 몸을 놀리는 덩치 큰 남자를 보며 박장대소한다. 술이라고는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고기 굽던 남자와 마주 보며 엉덩이를 흔들어댄다. 부끄러움이 유난히 많은 내 아이들조차 이런 엄마의 모습이 재밌는지 함께 들썩인다.
이렇게 크게 웃고, 온몸을 흔들며 즐거움을 만끽하는 건 실로 몇년 만의 일이다. 이런 내 모습이 낯설어 깜짝 놀라기도 한다.
나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고동민의 아내, 이정아다. 우리에겐 내린, 이든, 가온, 이름만큼이나 어여쁜 세 아이가 있다. 경기도 평택시 서탄면에 살고, 기적의 공간이라 일컬어지는 쌍용자동차 실직가족을 위한 심리치유센터 ‘와락’에서 일한다. 남편은 쌍용자동차 정문 앞 ‘희망텐트촌’에서 산다.
올봄, 쌍용차의 파업 가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 가압류 문제로 부랴부랴 이사를 결정할 때만 해도 나는 어딘가로 숨고 싶었다. 나의 이런 마음을 사람들에게 내보이지 못할 때, 손배 가압류는 좋은 구실이 되어주었다. 아무도 없는 곳, 아니, 더 정확히 우리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 쌍용차와 관계된 사람이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지워나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들은 다 내 인생에서 필요 없는 사람들이야. 쌍용차 파업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잖아. 그저 겉으로만 우리를 응원하는 척, 지지하는 척. 당신들을 지금부터 내 인생에서 전부 지워버릴 거야. 꺼져!’
그렇게 혼자 세상에 대한 소심한 복수를 하고, 누군가 우리에게 “힘내세요. 항상 응원할게요!”라며 박수를 보낼라치면 ‘저 박수 소리가 100% 진심은 아닐 거야’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던 시간들.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어느 시인의 노래가 가슴에 스며들지 못한 채 서걱거리던….
그런 내가 가요를 따라 부르며 웃는다. 흥이 오르면 엉덩이도 흔든다. 낯선 이들과도 눈 마주치며 스스럼없이 말을 섞는다. 얘기하다 내 감정에 북받쳐 울기도 잘한다. 그렇게 나는 ‘와락’을 통해 사람과 다시 마주 선다. ‘희망텐트촌’을 통해 다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과 다시 소통하고 싶다. 누군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넨다. “추운데 힘드시죠? 힘내세요. 끝까지 함께할게요. 파이팅!” ‘아, 이젠 당신의 이야기가 가슴에서 서걱거리지 않아요. 그 진심이 온전히 제게 전달이 돼요. 고마워요….’ 다가오는 13일. ‘희망텐트촌 2차 집중의 날’엔 어떤 풍경이 또 나를 흥분시킬지 벌써 기다려진다. 이정아 쌍용차 가족대책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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