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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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시·군·구 단위로, 사안별로
전문적 치유와 돌봄을 책임질
단기·중기·장기적 프로그램이 절실
언론에 비친 학교는 폭력의 온상이다. 대구와 광주의 중학생을 자살로 내몬 학교 내 집단폭력으로 여론이 뜨겁다. 경찰은 전가의 보도인 ‘학교폭력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렇게 국민적 관심이 높고 경찰까지 나섰으니 이번에는 믿어도 될까?
모든 사건에서 구경꾼은 흥미가 사라지면 눈길을 돌린다. 언론에서 한때만 선정적으로 떠들고, 당국은 늘 우려먹는 일회성 대증요법을 방책이라고 내세우면 해결될까?
치료에는 정확한 진단이 우선이다.
우리 아이들을 괴물로 만들고 있는 폭력성의 원인은 무엇인가? 실제로 생활지도부에 있으면서 집단 괴롭힘을 가한 아이들한테 왜 그랬느냐고 물으면, 아주 태연스럽게 ‘장난으로 그랬다’고 한다. 가해 아이는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상대 친구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원인은 바로 어른이 만든 이 사회가 제공하였다. 아이들은 인간으로서 가장 본능적인 욕구조차 억압당하면서 살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의 욕구 5단계에서 제1단계인 생리적 욕구조차 채워지지 않고 있다. 학원 가느라고 식구들과 단란하게 저녁을 먹지 못하고 인스턴트식품으로 대강 때운다. 조사해 보니 중3 아이들 중 8시간 이상 자는 아이는 20%도 안 된다. 한창 놀 나이에 ‘공부, 성적, 대학’ 앞에 또래들과 실컷 뛰어노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기본적 욕구인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모든 동물 실험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공격적이 된다.
가정의 교육 기능 상실도 근본적인 원인이다. 과거 대가족 사회에서 가정은 가장 기초적인 사회화 교육 기능을 맡았다. 그러나 지금은 가족간에 서로 얼굴 대하기도 힘들다. 거기에다 사회의 양극화 심화로 가정이 불안하다. 절반이 비정규직인 현실 등 고용 불안과 가난은 가정폭력과 가족해체를 낳고 아이들은 방치된다. 학교폭력을 조사하다 보면 가정의 폭력적인 환경이 근본 원인일 때가 대다수다.
특히 학교 교육이 더는 계층 상승의 사다리로 작동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가난한 부모의 자식들은 절망부터 배운다. 소득 1분위 가구와 10분위 가구의 사교육비 지출 격차가 10배가 넘는 현실에서, 대학은 물론 고등학교까지 서열화된 현실에서 가난한 집 아이들은 학교 교육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중산층 아이들도 학교를 불신하기는 마찬가지다. 부모의 높은 기대와 욕구에 움츠러들고, 비싼 사교육에서 경쟁력을 쌓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학교는 단지 오락실에 불과하다.
교육과 사회의 불일치도 아이들을 병들게 한다. 현란한 상업자본주의는 상품이든 대중문화든 끊임없이 아이들의 소비 욕망을 자극한다. 그러나 가정과 학교라는 회색지대에서는 이기기 위한 성적 경쟁만 강조할 뿐 아이들의 삶 자체를 바라보지 못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문화 또한 학습 환경이 된다. 사회의 모든 구석에서 자행되는 강자의 약자에 대한 무한 폭력을 아이들은 그대로 보고 배운다. 직원을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패고 맷값을 던져준 재벌가 2세의 사건은 단적인 예다. 심지어 집회나 철거나 파업 현장에서 공권력조차 폭력을 휘두르는 환경에서랴. 아이들은 힘센 어른들이 만들어낸 사회의 피해자다. 90%가 넘는 아이들이 험한 욕을 입에 달고 살면서 폭력적인 게임을 무한경쟁의 도피처로 삼고 있는 현실에서, 잠재된 분노와 폭력성이 사이버 공간과 현실 공간을 제대로 구별하여 드러날까 싶기도 하다. 그러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 더 평등하고 안전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만드는 일,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다원적인 사회를 만드는 일들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일이다. 가정과 학교는 고립된 섬이 아닌 만큼 사회가 건강하지 않으면 가장 빨리 병드는 것은 순수한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열네살 아이들을 구속한다고 경종이 울릴까? ‘스쿨 폴리스’ 제도로 학교폭력을 형사사건으로 처리하는 미국에서 폭력이 더 증가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선가? 1982년 노르웨이에서는 학교폭력으로 3명의 학생이 자살하자 국민적인 교육운동이 일었다. 학교폭력을 야기하는 요인을 연구하고, 방지를 위한 정책을 내고, 어릴 때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 결과로 학교폭력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한다. 학교가 아이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현실에서 교사는 당연히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갈수록 거칠어지고 사나워지는 ‘사회의 아이들’ 앞에서 교사들은 냉가슴만 앓는다. 심지어 무시하고 욕하고 대드는 아이들 문제를 하소연조차 못하는 경우도 많다. 아이들이 잘못을 해도 현재 중학교에서는 최고 1년 동안 등교 정지 30일을 내릴 수 있고, 안 되면 전학을 권유해 다른 학교로 책임을 전가하는 조처만 할 수 있다. 십수년 전 ‘교실 붕괴’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들은 조한혜정 교수의 말씀이 생각난다. 미국의 어느 카운티(교육구)에서는 부적응 대안교육 업무를 하는 공무원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각종 부적응 학생, 폭력 가해자와 피해자,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 등 치유와 돌봄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공립 대안학교나 프로그램을 만들고 운영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이런 치유와 돌봄 프로그램에 30% 정도의 학생들이 혜택을 받는다고 한다. 오랜 상처로 삐뚤어진 아이는 마음이 병든 환자다. 따라서 지식 교육에 앞서 전문적인 치유를 받아야 한다. 이 치유는 부모 개인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공적으로 제도화해야 한다. 간판만 교육지원청이라고 바꾸지 말고 학교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를 지원해주어야 한다. 최소한 시·군·구 단위로, 사안별로 전문적 치유와 돌봄을 책임질 단기·중기·장기적 대안 교육 프로그램이 절실하다. 이는 치유받아야 할 한마리 양에게도, 돌봄을 받아야 할 아흔아홉마리 양에게도 모두 절실한 방안이다. 법령을 마련해야 한다면 바로 검토할 일이다. 또한 이번 일에서 교육당국은 졸속 대책을 내세우기 전에 자기 성찰부터 하기 바란다. 사람 키우는 교육에 ‘경쟁과 효율성’이라는 시장의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된다. 획일적인 일제고사 실시를 강제하고, 각종 계량적인 평가로 단기적인 성과를 측정하여 상벌로 길들이고, 자율형 학교다 기숙형 학교다 하여 차별화로 교육 현장을 살벌한 줄세우기 전쟁터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교육시설 등 외형 덧칠하기보다 학급당 학생수를 줄여 개별 지도와 돌봄이 가능하게 지속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더는 학생인권조례 제정까지 방해하거나, 혁신학교까지 왜곡하려 드는 꼼수를 부려서도 안 된다. 비인간적 경쟁교육을 비판하면서 더불어 사는 교육을 주장하는 교사 집단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공부 가르치기를 싫어하는 교사들이라거니 ‘좌빨’이라거니 매도해서도 안 된다. 흑백논리로 가르는 일은 민주적 토론을 가로막는 폭력의 다른 얼굴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일찍이 1991년에 ‘유엔아동권리협약’을 비준했다. 이에 따르면 18살 미만 청소년은 각종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는 물론, “휴식과 여가를 즐기고, 자신의 나이에 맞는 놀이와 오락활동에 참여”(31조)할 권리까지 명시되어 있다. 법률과 같은 국제협약에 명시된 아이들의 ‘쉬고 놀 권리’를 누가 빼앗았는가? 누가 우리 순수한 아이들을 괴물로 만들고 있는가? 신연식 서울 동마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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