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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1.30 19:30 수정 : 2011.11.30 19:30

최근 몇몇 대학은 논술이라는
기본 개념을 망각하고 있다
영어 제시문·수리문제를 끼워 넣는다

논술시험을 치르는 기간 동안 매년 나는 홍역(?)을 앓는다.

이번에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과로한 탓에 감기에 걸렸고 목 통증으로 고생했다. 몸이 무겁고 힘든 것도 괴로웠지만 이에 못지않게 심적으로 버거운 것은 학생들의 ‘사고력 빈곤’으로 인한 설명하기의 난감함이다. 논술문제 분석에서 1차 에너지를 쏟고 ‘이 문제를 아이들이 소화할 수 있을까’를 놓고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에 2차 에너지를 쏟아부을 때 심한 압박감을 느낀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문제들.

-A대학 2011학년도:

1) 제시문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비교분석하시오.(1000자)

2) 제시문 <가>, <다> 각각의 입장에 근거하여 제시문 <라>의 실험결과를 해석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쓰시오.(1000자)

제시문:

(가) 가다머 <과학시대의 이성>

(나) 다이앤 포시 <안개 속의 고릴라>


(다) 필로데모스 <죽음에 관하여>

(라) 둥켈

-B대학 2005학년도:

세월이 흘러가며 드는 욕망의 변화를 제시문 논거를 바탕으로 논술하시오.(1800자)

제시문:

(가) 이명한 <백주집>

(나) <구약성서> 전도서 2:18-23

(다)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라) 티치아노 <인간의 세시기> - 서양화 그림

(마) 예이츠 <나이들면 철이 드는 법>

만만치 않은 제시문들인데, 책 읽기와 아주 거리가 먼 다수 학생들이 이를 어찌 독해하고 소화하겠는가. 평소 독서 내공의 힘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독해가 쉽지 않다. 고3 논술수업의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당연히 책 읽기를 통한 사고력·분석력·비판력 확장이 우선인데, 현실은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어(고교 현장이 책을 읽히지 않으니까) 출제의도 해설 이후 곧바로 글쓰기 작업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치 현대인들이 너무 바빠서 꾸준한 운동을 통한 면역력 강화로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종합비타민제 복용으로 위안을 삼고 운동을 게을리하면서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몸에 좋은 약만 잔뜩 먹어서 푸석푸석한 살은 엑기스만 담은 단기처방 문제풀이식 논술수업이고, 정기적이고 꾸준한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하고 매끈한 근육질의 몸은 평소 다양하고 깊게 책을 읽어서 나오는 깊은 향의 논술 답안지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그리고 확실히 다르다. 같은 문제지를 던져 주지만 반응은 엇갈린다. 매혹적인 근육(?)을 가진 학생들은 여유있게 글을 써 내려간다. 반면 말랑말랑한 살(?)을 지니고 있는 학생들은 펜만 굴리고 있다. 아니, 내 눈만 쳐다본다. 어떻게 써야 하냐는 눈빛으로.

게다가 한국 논술문제는 학생들이 워낙 책을 읽지 않아서(또는 읽을 수가 없으니까) 글을 제대로 못 쓸까봐 친절하게도(?) 제시문들을 제공한다. 그 제시문들도 이해하지 못할까봐 가끔 어느 대학은 출처까지 밝히기도 한다. 독해에 참고하라고 말이다. 글자수도 제한한다. 게다가 어느 대학은 특정방향(?)으로 글을 쓰지 않으면 점수를 주지 않는 황당함을 당당하게 저지르기도 한다. 문항도 보면 전제조건과 부대조건이 많다. 그 조건을 충족시켜야 점수를 준다. 예를 들면 특정 제시문의 입장에서 타 제시문의 입장을 비판·옹호·비교·설명하라고. 학생들이 워낙 횡설수설(?)하니까 아예 못을 박아둔다고 봐야 할까. 그러면 그럴수록 사유력은 점점 시들어 가고 결국 논술의 본령인 창의적 사고 측정은 요원해진다.

하지만 프랑스 논술시험인 바칼로레아는 제시문이 없다. 전혀 없다. 문항은 보통 한 줄. 글자수 제한도 없다. 그리고 한국 논술처럼 ‘출제의도’나 ‘예시답안’을 내놓지도 않는다. 대신 언론에서 바칼로레아 문제를 보도한다. 이에 따라 파리의 술집과 카페에서는 바칼로레아에 출제된 주제에 관한 난상토론이 벌어지는 진풍경이 펼쳐진다고 한다. 시험문제는 이렇다.

-우리는 지각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가?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동물적 욕구와 인간적 욕망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객관적 시각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시간은 우리의 적인가, 아니면 친구인가?

-추한 것이 예술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노동은 어떤 면에서 윤리적 가치가 있는가?

-당신은 신념에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릴 수 있는가? 그것은 이성과 대립되는가?

-철학이 ‘신학에 사용된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역사는 비극적인가?

-설명한다는 것과 해석한다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리는 모든 것에 회의할 수 있는가?

-본성에 근거하여 법을 만들 수 있는가?

-권력 남용이 존재하는가?

-반항한다는 것은 자유의 표현인가?

-행복은 쾌락의 연속인가?

최근 몇몇 대학은 논술이라는 기본 개념을 망각하고 있다. 영어 제시문을 배치해 영어실력을 동시에 체크하면서 수리문제도 끼워 넣어 수학실력도 점검하고 있다. 지나가는 똥개가 웃을 일이다. 이게 무슨 논술인가. 기본적으로 논술에서는 바른 답, 그야말로 정답이 존재할 수 없고, 무한한 사유의 확장과 다양함이 있을 뿐이다. 타당한 논증과 함께 말이다. 과연, 위에 예시한 프랑스 논술시험 문제에 대해서 한국 고등학교 학생들은 얼마만큼 ‘생각’하고 쓸 수 있을 것인가? 최택진 논술강사·서울시 광진구 중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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