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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1.23 19:37 수정 : 2011.11.23 19:37

이정화 울산시 중구 태화동
이제 큰딸이 대학생이 되었을 때
반값 등록금을 위해 앞에 선다면
그때 나는 어떤 엄마여야 할까

입학사정관 전형 합격자 발표가 시작되면서 딸이 떨어졌다는 통보를 받고 나서부터 난 먹었다 하면 체했다. 가슴에 커다란 덩어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속이 메슥거렸다. 그런데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지, 조금만 먹지 않으면 또 배가 고파져 먹고 또 체하고….

대학 입시라는 것이 뭐라고 엄마를 이렇게 힘들게 할까? 수능을 치르고 가채점을 해 보더니 최저등급을 막지 못해 수시 1차에 넣은 것은 논술시험을 치러 가지도 못한다고 한다. 엄마는 위대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아직 엄마가 될 자격이 없나 보다. 아이를 위로해줘야 하는데 화가 치밀어 올라 고함을 질렀다. “그래. 네가 공부 열심히 안 하고 딴짓할 때 알아봤다. 좀더 열심히 하지 그랬어.” 그런데 딸은 정말 당당하다. 자신은 고등학교 생활을 정말 즐겁게 보냈기 때문에 후회 없단다. 특목고도 아닌 일반 고등학교에서 이렇게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나 자신의 인문학적 교양이 넓어졌고, 혼자 읽었으면 절대로 다 읽지 못했을 책들을 읽어냈고, 토론 활동을 통해 내용을 더욱더 다지기까지 했으니 행복했다고 한다. 난 할 말이 없다. 그래도 변명하자면 너의 가치를 알아줄, 너를 갈고닦아 보석으로 만들어 줄 그런 학교에 시험도 쳐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딸은 말한다. 분명 자신의 가치를 알아줄 학교는 있을 것이라고.

며칠 전 토요일에 휴가를 내고 지방 국립대 논술시험을 치러 함께 갔다. 새벽부터 서둘러 운전을 했더니 피곤해서 딸이 시험을 치는 동안 나는 차에서 내리 잠만 잤다. 겨우 깨어 고사장에 갔더니 기다리고 있던 부모들 모두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수험생 엄마 맞아?’ 하며 부끄러웠다. 다음날엔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딸이 치는 마지막 논술시험이었다. 함께 간 딸의 친구 엄마는 매일 새벽 1800배 기도를 했다고 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딸이 시험 못 치고 떨어지면 모두 내 탓이겠거니. 시험장에서 나온 딸은 싱글벙글 웃는다. 다른 아이들은 어렵다고 말하는데 딸은 가만히 있었다.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한다. 어제와 오늘 논술은 정말 자신이 흡족할 정도로 완벽하게 치렀다고 말했다. 다행이다. 딸에게 친구 엄마 이야기를 해주며 다른 엄마들은 고3이 있으면 영화도 보러 가지 않고, 엄마가 즐거운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데 엄마는 동생이랑 영화도 보러 다녔다고 했다. 딸은 말한다. 왜 딸의 인생에 부모들이 동동거리느냐고, 감옥에서 사느냐고. 그냥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아주기만 해도 된다면서 말이다. 괜히 수능날 화낸 것이 미안해진다. 딸은 학교 친구들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어떻게 지원해야 할지 고민인 친구, 가정형편은 좋지만 성적이 안 되는 친구, 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가 했던 고민들을 딸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

내가 대학 다닐 때를 생각해보았다. 친정아버지는 절대로 딴짓(?) 하지 말고 공부만 해서 선생님이 되라고 했다. 80년 광주를 머리로 알고 6·10항쟁을 온몸으로 겪으며 가슴에 불을 붙였던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던, 여성 해방을 외치던 그 시절은 어디로 가버리고, 어느새 친정아버지처럼 딸에게 말하고 있다. ‘사범대학은 가야지 여자가 취직이 쉽지’ 하며 사범대학에 원서를 넣으라고 억지를 부렸지만, 딸은 끝끝내 자신의 뜻대로 ‘신문방송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어쩌면 내가 선생님이 되지 못해 한스러워 나 대신 딸이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부모는 절대로 자식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체감했다.

언제나 서로 도우며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던 나는, 나만 바라보는 어리석은 엄마가 되어 내 자식만 잘되길 바랐던 것 같아 정말 부끄럽다.

김진숙씨가 309일 동안 크레인 위에서 버틸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지? 하물며 딸까지 응원을 하고 있었는데. 지난여름 기독교장로회 주최 여름 캠프지에서 제주 4·3항쟁의 장소인 동굴을 보고 온 작은딸은 집에 돌아와 정말 슬펐다며 끝나지 않은 노래 “외로운 대지의 깃발~”을 불렀다. 아름다운 제주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면서 말이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북한 어린이 돕기를 위해 자신들의 작은 저금통을 아낌없이 내놓고, 태화강의 환경을 지키기 위해 몸과 가슴으로 느끼며,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야 한다는 것을 아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정말 작아진다. 이 땅의 수험생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비록 자신이 원하던 곳에 완벽하게 합격하지 못했을지언정 그 자리에서 분명 큰 쓰임을 받을 사명을 띠고 태어났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들을 아름다운 각각의 보석으로 빛낼 그런 학교에 모두 합격하길 바란다. 그리고 옆에서 우리 엄마들은 열심히 응원해주자. 나처럼 아프지 말고 모두 건강하시길 빈다. 이제 큰딸이 대학생이 되었을 때 반값 등록금을 위해 앞에 선다면 그때 나는 어떤 엄마여야 할까 고민한다. 우리 딸의 현명한 선택에 맡기며 응원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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