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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1.14 19:23 수정 : 2011.11.14 19:23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최강욱 변호사
과연 ‘민주’ 사회에서 우리 국군은
‘쿠데타 안 하는 것’만을 유일한
민주적 행태로 자부하면 되는 것인가

군대의 숫자는 의미를 담은 징표인 경우가 많다. 특정 숫자의 조합을 통해 부대의 단위나 지역을 상징하기도 한다. 군용전화는 국번과 번호만으로도 어느 지역의 무슨 부서인지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역시 가장 중요한 숫자는 ‘1’이다. 군의 지휘체계와 상명하복을 필수로 하는 조직구조상, 최고의 위치에 부여하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1호’는 늘 지휘관의 차나 그가 사는 집을 상징한다. 하긴 꼭 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장관급 인사들의 차량 번호도 대개 ‘1001’번이니.

최근 국방부의 전화번호를 놓고 해군과 공군 장교들이 조심스레 나누던 이야기가 문득 생각났다. “어째서 장관실 전화번호가 1000번이 아니고 6000번일까?” “국방부가 아니라 ‘육방부’라서 그렇겠지….” 육군 지휘관의 군용 전화번호는 모두 6000번이라서 나온 말이다.

그렇다면 국방부의 1000번은 누가 쓰고 있을까? 주인은 100기무부대장(준장)이다. 기무부대는 설치된 단위부대별로 고유번호가 있는데, 국방부와 합참은 제일 상급 기관이므로 맨 앞에 ‘1’과 ‘2’를 써서 각각 100부대, 200부대가 된다. 기무사의 각급 부대별로 도 단위 부대에는 맨 앞에 ‘6’을 쓰며 사단급 부대에는 ‘8’을 쓰는 식이다.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 사건이 다시 꼬리가 잡혔다니 기가 막힌다. 과연 6000번이, 1000번의 상관인 기무사령관에게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 추궁을 지시할 수 있었을까. 이런 말도 안 되는 범죄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걱정을 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은 또 어떤가. 민간인 사찰에 대해 기무사는 요원들의 아이디가 도용당했다고 일단 발뺌했다가 서울과 광주에서 협력해 이루어진 일로 밝혀져도 “말단 요원들이 서로 마음이 통해 임의로 행한 돌출적 범행”이었다며 요지부동이다. 기무사가 무슨 친목단체란 말인가. 이러니 최근에는 사건의 은폐·조작을 위한 대책회의까지 했다는 의혹마저 불거지고 있다.

독립운동가를 잡던 일본 헌병 군속 출신 김창룡을 ‘시조’로 받드는 기무사. 그래서 현충일이 되면 어김없이 사령관이 그의 무덤에 헌화하는 조직. ‘특무대’와 ‘방첩부대’를 거쳐 대통령을 배출한 자부심을 앞세우던 무소불위의 권력기관 ‘보안사’에 이르는 과히 아름답지 못한 역사와 전통에도 불구하고, ‘국군기무사령부’는 사찰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지은 새 이름이었다. 1990년 10월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드러난 보안사 민간인 사찰의 아픈 기억이 그대로 녹아 있는 새 이름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국무총리실 민간인 사찰 사건의 충격과 함께 2009년 8월의 기무사 요원에 의한 민간인 사찰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때도 기무사는 거짓말로 일관하며 둘러댔으나, 법원은 이를 믿지 않고 1억여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렇듯 헌법질서를 위협해도 책임지고 처벌받은 사람은 없다. 하물며 사찰 당사자인 신아무개 대위는 사건 이후 소령으로 진급까지 했다고 한다. 헌법과 국민에 대한 충성보다는 조직에 대한 충성이 우선한다는 것인가? 기무사가 조직의 임무로서 상습적으로 민간인 사찰을 해온 게 아니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작년 8월엔 감시와 사찰을 견디지 못한 현직 사단장이 기무사 장교를 고소했고, 올해 2월엔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 숙소 잠입 사건에 관여한 사실이 회자되기도 했다. ‘무소불위’라는 단어 외엔 도무지 설명할 방법이 없다.

내부를 알 수 없는 철저히 비밀스러운 조직, 각종 명목으로 숨어 있는 거액의 예산을 사용한다고 의심받는 조직, 군이라는 장막 안에 한겹 더 장막을 치고 민주적 통제 앞에 거의 노출되지 않는 조직이 기무사의 변치 않는 모습이다. 게다가 권력의 수요에 부응하고자 그 보폭을 민간인 사찰에까지 확산한 것이라면 정말 큰일이다. 국가정보원을 능가하는 괴물이 되었다는 것이니.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불길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왜 기무사는 자신의 본분을 넘어 무리한 범죄행위에 가담한다는 의심을 자초하는가. 그건 결국 우리가 이룬 ‘민주화’가 아직 제도로 정착하지 않았다는 의미 아닐까. ‘군부독재’를 극복했다는 우리의 민주화는 쿠데타의 걱정을 덜고, 국회의원들이 군 장성에게 얻어맞는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데서 그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는 법과 제도 및 관행에 남은 ‘군부독재’의 잔재를 ‘민주화’의 과정에서 얼마나 털어냈는가. 도무지 군 관련 정책을 놓고 우리 사회가 치열하게 논쟁한 기억은 잊힐 만하면 고개를 쳐드는 ‘군 가산점’ 제도밖에 없지 않았던가.

특수성, 군사기밀, 국가안보의 장막에 숨은 군은 무력과 정보력을 갖고 사법권까지 별도로 행사하며 자신을 보위한다. 자기 비리를 자기가 수사하여 스스로 재판하고, 수사관 및 재판관을 임명한 지휘관이 그 형마저 결정하는 구조는 여전하다. 수많은 이들을 법정을 가장한 ‘군법회의’에 세웠던 계엄법도 똑같다. ‘국방부 불온서적’ 사건에서 보듯 국민의 기본권은 군대의 담벽을 넘지 못한다. 예전의 보안사령관처럼 기무사령관은 장관을 제치고 대통령을 만난다. 도별로 설치된 ‘6○○ 기무부대’는 ‘○○공사’라는 음침한 간판을 달고, 그 부대장은 사장으로 위장한다. 대령에 불과한 계급을 갖고도 사단장과 나란히 지역 주요 기관장 모임에 참석하기도 한다. 대체 무엇 때문에 도마다 기무부대가 필요한 것인지는 알려진 바 없다. 현실이 이러하니 예전과 다르다 강변하면서도 여전히 군내 최고 파워를 자랑하는 기무사 소속원은 비리를 저지를 경우 ‘일반 부대’로 돌아가는 것을 가장 커다란 징계로 받아들인다. 현직 사단장조차 자신의 거처를 샅샅이 수색당하고 행선지를 감시당한다며 법에 호소해도 아무런 대책이 없다. 진급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답답한 구조 안에서, 지휘관에 대한 감시와 간섭을 ‘지원’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포장하여 직업군인의 삶 위에 군림하는 기무사.

철저한 감시에 놓인 시민들과 보이지 않는 정보국 요원의 삶을 1984년의 동독을 배경으로 담아낸 영화 <타인의 삶>. 10만명의 비밀경찰과 20만명이 넘는 밀고자의 목표는 단 하나, 불의한 권력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데 있었다.

오늘, 우리의 기무사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비즐러’는 인간에 대한 예의와 헌법질서에 대한 외경을 얼마만큼 간직하고 있는가. 우리의 현실은 1990년 윤석양의 고뇌에서 얼마큼 전진하였는가, 아니 1984년 동독의 현실보다는 얼마나 나은 것인가. 이 무서운 현실 앞에 둔감해진 채, 불안한 현재와 불투명한 미래를 두고 민주화를 이루었다며 자랑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안보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며 이름까지 바꾼 우리의 기무사는 언제나 이무기의 신세를 벗어날 수 있을까. 과연 ‘민주’ 사회에서 우리 국군은 ‘쿠데타 안 하는 것’만을 유일한 민주적 행태로 자부하면 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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