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0.07 19:44
수정 : 2011.10.07 19:44
김원영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근대를 특징짓는 말은 이른바 합리성이다. 합리성에는 예측가능성도 포함되는데, 예측가능성은 근대적 삶에서 중요한 조건이다. 내가 내일 2시에 어떤 장소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면, 지진이나 전쟁과 같은 특수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 약속은 대체로 지켜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본은 투자를 하고 노동자는 직업을 가질 수 있으며 상인들은 물건을 만들어 내다 팔 수 있다. 지나치게 거미줄처럼 엮인 근대 도시적 삶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적어도 도시에서 경제생활을 영유하며 살아가려면 예측가능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장애인들에게 (쥐꼬리만하기는 하지만) 복지혜택만 받지 말고 직업을 얻으라고 주장할 때는 위와 같은 예측가능성이 장애인들의 삶에도 확보될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는 어제 중요한 약속을 서울 강남역에서 아침 10시에 잡았다. 집에서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도보로 10분이 걸리고 그곳에는 엘리베이터가 있다. 나는 언제나 장애인들의 이동경로에는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는 점까지 고려하고 일반적으로 3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를 한 시간 넘게 일찍 나선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고장나 있었고, 호출기 버튼을 눌러도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장애인콜택시를 이용하면 될까? 콜택시는 최소 15분에서 최대 6시간까지 기다려야 하는 교통수단이다. 그러므로 친구를 만나면서 귀가를 위해 콜택시를 불러놓은 뒤 식당으로 들어간다면 식사가 나오기도 전에 택시가 온다. 때로 즐겁지 않은 자리에서는 4시간 이상 기다려도 택시가 오지 않는다. 2시간 전에 미리 예약해놓을 수 있지만 이것은 2시간15분부터 6시간 사이에 차가 온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버스를 찾아보았더니 휠체어 탑승이 가능한 저상버스는 30분을 기다려도 보이지 않는다. 워낙 노선도 드물어서 이 역시 예측가능한 삶을 설계할 수 있는 이동수단이 전혀 아니다. 일반 택시는 어떨까? 택시기사들은 대체로 휠체어 승객을 기피하는데, 서 있는 차에 다가가 말을 걸면 (아마도 하필 그날따라!) 관절염에 걸렸거나, 디스크가 있는 기사들뿐이다. 또는 내가 말을 건 그 시간이 항상 집에 들어가는 때라거나 그날은 영업을 하지 않는 차라고 한다.
이동권의 보장은 몇가지 편의시설의 설치로 전혀 확보되지 않는다. 10년 전과 비교해 일부 늘어난 서울의 시스템은 ‘나들이’할 기회를 확대시킨 것에 불과하다. 6시간이 늦어도 별문제가 되지 않는 여유있는 외출을 할 수 있을 뿐, 약속하고 계약하고 확인하고 책임지는 그 어떤 일도 수행할 수 없다. 우리 눈에 가끔 들어오는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의 사례는 대체로 그 부모가 이 예측불허함을 최소화하기 위해 직업을 그만두고 직접 차량을 개조하고 수없이 이사를 다니며 만들어낸 희생의 성과들이다. 도시는 장애인들의 이른바 ‘극복 스토리’에 기여한 바가 없다.
그럼에도 서울은 얼마나 대단한 도시일까? 거대한 경제규모와 인구, 치밀한 교통망을 갖춘 이 도시에 새로운 시장이 탄생하면 새로운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그들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장애인 시설에서 아이를 목욕시키는 장면을 생중계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일도 아닐뿐더러 모욕적인 일일 뿐이다. 이번 서울시장의 임기가 끝났을 때, 내가 한 시간 뒤의 일을 예측할 수 있는 서울에서 살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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