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9.26 19:32
수정 : 2011.09.26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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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창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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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학기술부가 역사 교육과정에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를 쓰기로 한 데 항의해 ‘역사 교육과정 개발 추진위원’에서 사퇴한 오수창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글을 보내왔다.
요즘 뜨겁게 타오른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사이의 논란 속에서 우리 사회의 ‘자유민주주의론’이 좀더 뚜렷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교과서에 ‘자유민주주의’를 써야 한다는 헌법학자 등 많은 이들이 자유민주주의는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하는 것임을 명확히 하였다. 여당 원내대표는 ‘사회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의 한 계파로 파악하는 것이 헌법 논리’라고 하였다. 그들은 또한 외국 학자의 견해를 빌려 자유민주주의란 ‘민주주의가 심화하면서 더 높은 단계의 특성을 갖게 된 것으로서, 권력에 대한 강한 통제, 강력한 법치주의, 정부의 높은 투명성, 개인 권리의 폭넓고 두터운 보호 등이 그 내용’이라고 역설하였다.
이번 논란은 지난달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역사 교육과정을 고시하면서 기존 ‘민주주의’를 모조리 ‘자유민주주의’로 바꾸자, 원안을 개발한 위원 중 필자를 포함한 거의 전원이 ‘민주주의’를 되살리라는 성명을 내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가 진정 위와 같은 내용을 지니는 것이라면 그것을 역사교육의 의제로 채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전에 자유민주주의론자들이 수행하여야 할 선결 과제가 있다.
첫째, 이론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론자들은 인민민주주의가 민주주의에 포함되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의 개념을 채택해야 한다고 한다. 보수 신문에 ‘인민민주주의 이론가를 죄악시할 필요는 없다’는 견해가 거침없이 개진되었다. 논의의 지평을 넓히는 것은 좋지만 학문적 논의뿐 아니라 교육현장에서 인민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가르쳐도 되는지 합의된 내용을 제시해야 한다. 방향을 달리하여 북한의 인민민주주의가 ‘가짜로’ 민주주의를 표방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라고 구분해 불러야 한다고 하는 경우에도 문제는 심각하다. 한 나라의 체제 이념을 ‘가짜’와 구분하는 차원에서 설정해서야 나라의 ‘품격’을 유지할 수 없다. 이 구차한 상황을 극복할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다음은 반성이다. 자유민주주의론자들은 마지막 법정 심의회까지 통과한 역사 교육과정을 밀실 논의를 통해 변경하게 했다. ‘권력에 대한 강한 통제’ ‘정부의 높은 투명성’ ‘민주적 절차’를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론자들은 자기 이념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그 행적에 대해 반성하고 원상복구에 나서야 한다. 혹자는 고시 권한이 교과부 장관에게 있음을 말하지만, 그 권한이 헌정·국체와 연관하여 큰 논란이 되는 사항까지 임의로 고치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색깔론’ 구사에 대해서도 반성해야 한다. 역사 교육과정에 민주주의를 복구하라고 주장한 위원들은 수많은 비판과 비난을 받았지만, 그 성명서에서 단어 하나 글자 하나 틀렸거나 고쳐야 할 내용을 찾을 수 없었다. 그동안 단순한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쏟아낸 ‘친북·종북’ ‘인민민주주의를 넣자는 것’ ‘헌법정신 부정’ ‘거짓말’ ‘반(反)대한민국적 사학자들’이라는 비난에 대해 정중한 사과를 해야 한다.
그다음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여전히 사회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다른 자유민주주의론자들에게 후자는 전자를 포괄한다는 사실을 설득해야 한다. 특히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워 시장과 경쟁 만능주의를 역설하고 헌법의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배격하는 이들에게, 헌법정신을 일깨워주고 평등과 복지의 중요성을 설득하여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를 내걸고 남북대결을 조장하는 이들에게, 바로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북한이 평화통일의 대상임을 주지시켜야 한다. 북한과의 평화통일은 헌법의 명령이다.
앞머리에서 확인된 ‘자유민주주의론’은 그 논리적 보완을 마치고 위와 같은 반성과 실천을 통해 현실적인 진정성을 획득하여야 한다. 그러기 전까지는 시장·경쟁·남북대결만을 떠받드는 현실의 자유민주주의를 호도하는 공리공담일 따름이다. ‘자유민주주의’가 공리공담에서 벗어나 현실적 진정성을 지니게 될 때 비로소 그것이 한국 현대사의 사실에 부합하는지 논의할 수 있다. 지금은 한국사의 사실을 가르치고 역사적 사고력을 길러주는 틀로서 ‘민주주의’에 흔들림이 있을 수 없다.
오수창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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