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성 ‘한·중·일 공동기획 평화그림책’ 기획위원
일본 출판사가 어렵게 출간하려는데
출간 준비회의차 국내에 들어오려는
재일동포 번역자가 입국을 거부당했다
<꽃할머니>라는 그림책이 있다. 지난해 일본 정부의 사죄를 끝내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심달연 할머니의 가슴 아픈 사연과,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후세대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그림책이다. 필자는 이 그림책의 편집자다.
<꽃할머니>는 불행한 근대사를 공유한 한·중·일 세 나라의 그림책 작가들과 출판사들이 모여, ‘과거를 정직하게 기록하고 현재의 아픔을 공유하며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연대하자’는 다짐과 함께 어린이들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기획한 ‘한·중·일 공동기획 평화그림책’ 시리즈의 한 권이다. 나라마다 4명씩 12명의 작가들이 그림책 한권씩을 지어 모두 12권을 만들기로 계획한 ‘평화그림책’ 시리즈는 한·중·일 세 나라에서 똑같이 출판하기로 약속되어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지난해 6월 출간되었고 중국에서도 출간을 눈앞에 둔 <꽃할머니>가 일본에서는 출간이 쉽지 않다. 위안부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자국 내 세력의 반발과 위협을 걱정하는 일본의 출판사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욱이 <꽃할머니>는 일본에서 반드시 출간되어야만 하는 책이고, 일본 쪽 출판사도 그 점에는 동의하고 있으며, 출간을 위한 준비 작업을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다.
그런 중에 최근 이 그림책의 일본 출간을 지연시킬 또 한 가지 일이 있었다. 공교로운 것은, 사건의 배경이 불행한 우리 근현대사이고 주연은 주일 한국대사관이라는 점이다.
사연은 이렇다. 이달 중순 일본 출판사의 최고 책임자와 편집자, 그리고 <꽃할머니>를 일본어로 옮길 번역자가 내한하여, 한국의 작가·편집자와 함께 일본어판 출간을 위한 마지막 회의를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중요한 회의가 무기한 연기되었다. 주일 한국대사관에서 번역자의 국내 입국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그가 ‘조선적’ 재일동포인 까닭이다.
‘조선적’은 일제 패망 이후,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에게 자동으로 부여된 국적이다. 그 3년 뒤 한반도 남북에 각기 다른 정부가 세워지면서, ‘재일조선인’들에게는 국적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으로 귀화하거나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여 ‘외국인’으로 남거나 하는 선택지가 생겼다. 북한은 일본과 수교하지 않았으므로 북한 국적을 갖는 것은 제외되었다. 대신에 북한행을 희망하는 재일조선인들은 1950년대 중반부터 1984년까지 북한 정부가 대대적으로 시행한 이른바 ‘북송사업’에 의해 북으로 갔다. 이 세 가지 길 가운데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은 이들이 바로 2010년 현재 외교통상부 추산으로 약 6만명가량 되는 ‘조선적’ 재일동포들이다. 일본 영주권만을 가진 채 아무런 정치적 권리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이들은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크게 차별받으며 서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또한 그 상당수가 조국의 분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나라 ‘조선’의 국적을 고집하면서 하루빨리 한반도가 통일되기만을 기다리는 무모하리만큼 순진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일본제국주의의 폭압적 식민지배로 인해 뿌리 뽑힌 신세가 된, 비극적 역사의 피해자들이다. 그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이, 역시 비극적 역사의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을 번역하여 일본에서 출판되게 하는 것은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가?
‘조선적’ 재일동포가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주일 한국대사관으로부터 입국허가를 받아야 한다. 필자는 회의를 성사시키려고 출판사가 그의 재정과 신원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의 초청장, ‘평화그림책’의 취지와 내용을 설명하는 자료, 이미 출간된 4권의 평화그림책을,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과 함께 번역자에게 보내어 주일 한국대사관에 제출하게 했다. 거기에는 번역자가 72살의 노인이고 동화작가이며 많은 한국의 어린이책을 일본에 번역·소개한 한국 문화 전파자라는 사실이 적혀 있다. 그러나 대사관은 다른 자료들은 받기조차 하지 않은 채 초청장 하나만을 접수하여, 며칠 뒤 ‘불가’라는 빨간 도장이 찍힌 엽서 한 장을 발송했다고 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총련에 가깝거나 총련과 관계가 있다는 혐의로 오랜 기간 불허되어 오던 ‘조선적’ 재일동포의 대한민국 왕래는, 1990년 남북교류협력법 제정 이후 참여정부 시절에 이르기까지 거의 자유로워졌으나,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남북관계가 악화하면서 불허하는 건수가 급증했으며, 이에 따라 이들이 입국허가 신청을 아예 포기하는 경우도 크게 늘고 있다.
‘민족’과 ‘동포애’, ‘자유’와 ‘민주’,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의 추구를 헌법 전문에 명시하고 표방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필자는 주일 한국대사관과 외교통상부와 대한민국 정부와 독자 여러분께 묻는다. 비극적 역사의 피해자들을 끌어안는 인도적 차원에서도, 평화를 위한 민간의 출판 활동을 지원하는 차원에서도, 일본 사회에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환기하고 그 해결을 촉구하고자 하는 노력을 격려하는 차원에서도, 그도 저도 아니라면 분단 상황 속에서 대한민국의 체제 우위를 드러내 보여주는 국가안보적 차원에서도, ‘한·중·일 공동기획 평화그림책’을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조선적’ 번역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의 일본 출간을 성사시키기 위해 대한민국에 입국하는 것을 허가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아니, 최소한 그가 무슨 일을 하러 이 땅에 들어오려 하는지 그 까닭을 귀 기울여 들어봐 주기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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