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8.17 19:40
수정 : 2011.08.17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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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화가 고경화씨가 서귀포시 강정동 강정해안의 구럼비 바위 일부를 프로타주(탁본의 일종)한 뒤 강정바다와 범섬을 그린 것이다. 구럼비 바위는 해안의 약 1㎞를 이루는 거대한 현무암으로, 제주에서 유일하게 해안 전체가 하나의 용암판으로 형성됐다. 군데군데 작은 풀장 혹은 샘물 규모로 물이 솟아나며, 이곳 용천수와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면에는 멸종위기종인 붉은발말똥게가 서식한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물권 보전지역인 강정해안에 해군기지가 건설되면 구럼비 바위를 비롯해 해안 전체가 콘크리트로 매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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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릴레이 기고 ③ 김해자 시인·한국작가회의 회원
단지 탁본을 찍어낸 것뿐인데 흑백의 음영으로 드러난 다종다기한 문양을 보자 울컥했다. 위대하고 신비한 것을 목도했을 때 느끼는 경외감이라 해두자. 침묵 속에서 빚어진 아름다움은 묘하게도 우리를 고요로 이끈다. 그의 몸에 새겨진 상처와 무늬는 그의 살아온 내력. 파도와 바람이 그의 단단한 몸에 물살무늬를 빚어주고 먼 데서부터 흘러온 뜨거운 용암이 바다 앞에서 숨을 탁 멈추고 구멍을 뚫었을 것이다.
그 숨구멍 들락거리며 기수갈고둥이 8자로 몸을 맞대고 평등한 사랑을 나누고, 집도 절도 없는 붉은발말똥게가 게거품 물고 별빛 아래서 사리 같은 알들을 쏟아내고, 온갖 꽃과 풀들이 피어났을 것이다. 평평한가 하면 날렵하고 단단한가 하면 부드러운 젊은 노구 위로 굴착기가 삽날을 박고 수백톤의 육중한 콘크리트가 포위해 들어온다. 그래도 변함없이 날마다 몸으로 상형문자를 새기고 있는 그는 구럼비 바위.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삶이 눈물나게 소중하다는 것을 느낀다.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상실에 직면해서야 눈앞의 생은 늘 눈부셨다는 것을 체감한다. 친지와 친구의 죽음은 내 존재를 감소시킨다. 나는 나 하나로 이루어진 섬이 아니기 때문이다. 흙 한줌 모래 한알 꽃 한송이가 사라져도 우리는 오그라든다. 천혜로 빚은 생명은 우리가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군 당국과 정부에 감사한다. 해군기지 부지라는 장애 앞에서 비로소 사무치게 아름다운 구럼비 바위를 온몸으로 새기게 해주었으니. 하던 일도 때려치우고 풍찬노숙하며 빨갱이 소리 들어가며 고생하는 수많은 젊은이들. 그들은 지금 순수한 아름다움과 연애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은 숨구멍이자 존재의 확대이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덧없는 생을 살다 가는 인간에게 긴 세월이 빚은 천혜의 아름다움은 근원을 돌아보게 하고 무상을 뛰어넘어 우주의 온 생명과 내가 한 몸일지 모른다는 자각을 선사한다. 유용성의 잣대로 행복과 안심을 잃어버린 오늘날 우리에게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구원이다.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 한번 부서지면 다시는 복구할 수 없는 것.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것. 그것이 움직이는 병기인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다.
더불어 아름다움은 우리를 침묵하게 한다. 신비로움 앞에서는 말이 필요없다. 소음이 대부분인 일상에서 신비로운 침묵은 그 자체로 우리를 더 큰 것과 접속시킨다. 아름다운 것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의미 붙일 필요도 없이 그 자체로 좋다. 당장 쓸모가 없어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눈에 보이는 쓸모가 아니기에 경외스러운 건지도 모른다.
나는 살아있는 전언으로 가득 찬 구럼비 바위와 삶의 터전을 훼손하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몸으로 수억년 써내려간 귀한 상형문자를 한순간에 박살내지 말자고 주장한다. 배부른 소린가. 현실을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낭만주의자의 읊조림일 뿐인가. 그렇다면 난 기꺼이 철이 들지 않는 쪽을 택하겠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이득과 효용이 몰고 가는 어른과 강자의 열차에서 뛰어내릴 수 있다면. 권위나 돈과 힘에 의한 공포가 아니라 아름다운 침묵과 경외심이 우리를 인도하길. 건설하고 지키기 위해 부수고 망가뜨리는 일이 주업무가 되어버린 세상에 평화와 안심은 없다. 누군가가 굶어죽게 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냥 있는 대로 내버려두고 살 수는 없을까. 45억년 시간을 탁본한 먹 앞에서 나도 내 영혼을 탁본하고 싶었다. 생겨먹은 그대로 내 무늬를 새겨줄 먹과 종이는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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