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8.15 19:42
수정 : 2011.08.15 19:42
정용일 <민족21> 편집국장
23년 만이다. 그리웠던 옛 연인을 만났냐고? 아니면 그동안 잊고 있었던 고향집을 찾았냐고? 그랬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방북 취재를 ‘감히’ 시도했다는 이유로 <한겨레> 편집국이 압수수색당하고 리영희 선생이 구속된 지 23년 만에 다시 언론사가 ‘털렸다’.
지난달 24일 오후 6시께, 대부분의 사람들이 휴일 오후를 느긋하게 보내고 있을 시간. 20여명의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이 압수수색영장을 들이밀며 집으로 들이닥쳤다. 황당했다. 처음에는 ‘뭔가 오해가 있겠지’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집뿐만 아니라 <민족21> 편집실을 압수수색하는 데까지 나아가자 ‘도대체 이 무슨 황당한 일이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정원은 <민족21> 편집실을 압수수색하면서 “이것은 <민족21>에 대한 수사가 아니라 안영민(<민족21> 주간)과 안재구, 그리고 정용일 개인에 대한 수사일 뿐”이라고 강변했다. 과연 그런가? 언론사 편집국장의 컴퓨터와 취재수첩을 뒤지는 것이 단지 개인에 대한 압수수색일 수 있을까? 그들은 책갈피에 꽂혀 있던 각종 영수증과 금강산 온천 입욕권 그리고 개인통장과 여권까지 몽땅 털어갔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민족21>의 방북 취재 동영상과 필자의 취재수첩 그리고 인터뷰 녹음파일까지 몽땅 털어간 것이다. 거기에는 취재원들이 ‘보도하지 말 것’을 전제로 한 발언이 담겨 있으며, 취재와 무관하게 개인적으로 주고받은 대화도 담겨 있다. 국정원에 의해 그 자료들이 악용되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더 황당한 건 그다음이다. 그들이 압수수색을 단행하면서 제시한 명분은 “<민족21> 편집국장으로 활동하면서 북 225호국의 지령을 받아 암약했다”는 것과 “재일 공작원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활동해왔다”는 것이다. 이른바 ‘왕재산’ 조직의 지령을 받아 하부에서 선전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몇 차례의 수사가 진행된 다음 <조선일보>를 통해 그들이 흘린 혐의는 ‘왕재산’과는 또다른 선으로 225호국의 지령을 받아 암약했다는 것이다. 졸지에 ‘똘마니’에서 ‘넘버3’로 격상한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인 8월3일 <조선일보>에서 다시 더 황당한 보도를 보게 됐다. <조선일보>가 이번에는 <민족21>의 상선(上線)은 225호국이 아니라 북한 국방위원회 산하의 ‘정찰총국’이라고 보도한 것이다. 곧바로 각계의 성원이 답지했다. “아니 어쩌다 지위가 갑자기 격상된 거야?” “도대체 뭐가 사실이야?” 나도 모른다. 물론 며느리도 모른다. 그래서 뒤늦게 변호사에게 물었다. “이거 도대체 뭡니까?” “글쎄, 나도 20년 가까이 국가보안법 변론을 맡아왔는데 수시로 상선이 바뀌는 것도 황당하고, 조직사건으로 한 달이 넘게 수사하고도 구속하지 못하는 경우도 처음입니다.” 제발 부탁이다. 국정원은 <민족21>이 왜 압수수색을 당했으며,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어떤 행위를 했는지 지금이라도 제대로 밝혀라. 궁금해 죽겠다.
지난 4월 <민족21>은 늦봄(고 문익환 목사의 호) 통일상을 받았다. 사건이 터진 뒤 한 선배가 이런 격려성 위로를 전해왔다. “늦봄 통일상을 받은 사람들이 한번쯤은 겪어야 할 통과의례라고 생각하게.” 그러고 보니 그렇다. 같은 상을 받은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가 그렇고, 고 리영희 선생이 그랬다. 이걸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국정원은 왜 이런 황당한 짓을 벌이고 있는 걸까?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한-미 쇠고기 협상, 4대강 죽이기, 부자감세, 민생파탄, 남북관계 경색 등 ‘안 해본 게 없는 사람이 제대로 하는 건 아무것도 없는’ 현 정권의 실정을 신랄하게 비판해온 <민족21> 발행인 명진 스님에 대한 흠집내기라는 것을. 나아가 지난 10년 동안 6·15 공동선언의 정신에 가장 충실하고자 노력했던 진정한 통일 언론 <민족21> 죽이기라는 것을!
6시간에 걸쳐 코딱지만한 방에서 비지땀을 흘려가며 증거자료를 찾던 국정원 직원 중 한 사람이 열심히 뒤지다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압수수색 딱지를 붙인 시디가 있었다. 이름하여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그건 왜 가져가슈?” “제목이 수상하잖아요.” “그거 요절한 인디밴드 이진원의 유작인데, 몰랐수?” 그 수사관 “어, 그래요?” 하면서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뭐,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다 보니 요절한 인디밴드쯤이야 모를 수도 있다. 그래서다. 마지막으로 국정원에 묻는다. 몰라서 집어든 시디를 내려놓은 것처럼, 잘못된 수사도 이쯤에서 내려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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