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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6.24 19:46 수정 : 2011.06.24 19:46

이덕근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봉암리

그러니까 60여년 전이다. 당시 중학 5학년(현 학제로 고교 2학년)으로 기억된다. 스물 전 어린 나이로 참전했다. 지금까지도 생사가 교차하는 전쟁마당에서 죽어가는 전우의 참혹상이 뇌리에 확연하다. 오랜 세월, 잊을 만도 하련만 전쟁 공포에 몸서리쳐진다. 오매불망이라, 요즘도 가끔 전쟁 꿈을 꾸며 온몸에 식은땀을 흘린다.

나는 제주도 육군 제1훈련소에서 7주간의 훈련을 끝내고 중부전선으로 배치돼, 보병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포탄이 하늘을 날고 총알이 콩 볶듯 하는 전투중엔 휴식과 수면을 위한 교대도 없다. 후방에서 공급하는 식사(소금물에 적신 주먹밥 1개)도 제때에 배식되지 않을 땐, 허기진 배를 안고 굶어가며 전투에 임했다. 샘물이 없는 산악 고지에선 극심한 갈증으로 고생했고 밤 행군 때 길바닥에 고인 흙탕물을 마시기도 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모진 고통 속에 기진맥진, 체력의 한계선에선 자포자기하게 되고 죽음의 유혹에 빠질 때가 많았다. 결국에는 병영생활의 어려움을 이겨내질 못하고 중병(과로·탈진 상태)에 걸려 후방 병원으로 이송되어 의병제대를 했다. 치료 뒤 원대 복귀하지 않고 제대명령을 받은 것은 연령 미달이거나 혹은 당시 전황으로 미뤄 보건대 휴전협정을 위한 회담 진행과 연관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전쟁을 모르는 사람들은 전쟁을 쉽게 말한다. 전쟁은 어린이들의 병정놀이가 아니다. 인간의 하나뿐인 생명을 담보로 한 도박이요 무모한 죄업이다. 전쟁은 없어야 한다. 어떤 경우라도 전쟁을 막아야 한다. 하물며 동족상잔의 비극이란 절대로 있어선 안 된다. 그럼에도 남북간에는 6·25 전란 60년이 지난 지금도 휴전선엔 호시탐탐, 전운의 어두운 그림자가 걷힐 줄 모른다.

노후로 접어들어 지나간 날의 군영생활을 생각하려니, 장병들이 안쓰럽다. 최전방에서 주야로 고생하는 젊은이들의 노고가 애처롭다. 더욱이나 마주한 적이 남의 나라 이민족도 아니다. 같은 조상의 피를 이어받은 형제간 전쟁이란 웬 말인가? 미개한 원시사회라면 몰라도 현대 문명사회에서 동포들간에 총부리를 겨눈다는 것이 부끄럽다. 선대의 잘못으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탓하기 전에 잘못이 있으면 시정하고 용서하며 조국 한반도에 평화를 찾아 통일한국을 이룩해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전쟁이 재발한다면 서로 망하는 것이다. 남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우리민족이 망하는 것이다. 누굴 위해, 누구 좋으라고 전쟁을 한단 말인가? 아무리 미워도 한핏줄 형제이다. 형제라는 인륜을 잊어선 안 된다.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며 화합의 지혜를 찾는 것이다. 슬기로운 민족이라면 남남간 전쟁도 피하는 법인데 하물며 동족간 전쟁이란 말도 안 된다. 특히나 현대전에선 고성능 전자전과 대량살상무기의 파괴력에 승자든 패자든 전화로 남는 것은 전 국토 잿더미, 폐허뿐이다.

그렇다. 60여년 전에 비하면 통일론이 진일보했다. 건국 초기 이승만 자유당 독재 시절에는 오로지 북진통일이었다. 그에 반대하는 평화통일이란 용납하지 않았다. 백범 김구 선생이 남북분단을 반대하고 평화를 역설하시다가 암살당했고, 죽산 조봉암 선생이 평화통일을 주장함으로써 처형됐던 것이다. 민족적 비극이요, 국가의 수치이다. 하지만 보라! 독일이 통일되고 다민족 국가 유럽이 유럽공동체(EU)를 이루어 평화로운데, 우리는 분단 반세기를 지나 한세기가 가까워서도 화해와 평화는 고사하고, 통일의 여정이 멀고 험악하기만 하다. 일가친척간에 자유로이 오가며 안부 편지와 전화를 주고받기는커녕, 상종 못할 원수로 적개심에 불타 호시탐탐 총을 겨누다니 통탄할 일이요, 언어도단, 말문이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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