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
[왜냐면] 천국을 찾아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라 |
26일치 왜냐면 ‘과학에 사후세계를 위한 공간은 없다’를 읽고
과학은 경험과 이성을 도구로 하여 세상을 파악하는 체계이다. 26일치 왜냐면 ‘과학에 사후세계를 위한 공간은 없다’에서 김승열씨가 ‘증거’ 또는 ‘비합리성의 합리성’이라고 말하는 것도 결국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성서는 바벨탑의 비유를 통해 이런 종류의 노력이 빚어내는 결과를 예언한다. 바벨탑은 진흙벽돌과 역청으로 지어지는데, 얼핏 생각하면 이 두 가지의 재료만으로 탑을 무한하게 높이 쌓아 올리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 진흙벽돌은 경험을, 역청은 이성을 상징한다. 진흙과 같이 무정형으로 뒤섞인 잡다한 경험들을 ‘개념’이라는 적당한 크기의 벽돌들로 찍어낸 다음 이것들을 논리라는 역청으로 이어 붙여 체계적으로 쌓아 올린 것이 과학이다. 과학은 마치 하늘 끝에 닿을 듯 말 듯 완전한 진리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높이 올라가더라도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무한이라는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기 때문이다.
천국은 경험과 이성을 부정하는 곳에서 발견된다. 그곳은 ‘실존적 자아’라고 부를 수 있는 자아의 내면으로부터 드러나는 세계이다. ‘부정’은 현실을 넘어선 다음 더 큰 지혜의 힘으로 그것을 다시 포용하는 일이다. 천국은 사후세계가 아니라 신적 지혜로 현실을 포용하고 다스리는 ‘사건’이다. 바오로의 표현대로,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로마서 8:19) 그런데 이런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신이 사람에게 내려주는 성령의 힘으로 신을 닮아야만 한다. 이를 두고 예수는 말한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시오.”(마태오복음 11:29) 온유와 겸손은 각각 재물(쾌락)과 명예(권력)에 초연하도록 하는 성령의 활동이다. 성령이라는 멍에는 처음에는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점점 편해져서 나중에는 그것이 없이는 세상을 살아갈 수도 없다.
과학주의자들은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을 건너뛰고 물리적 사건들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신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자아를 잃은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신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한다. 그는 자신 안에 고요히 머물러 신과 사귀고 있는 기독교인을 ‘사후세계라는 기저귀’를 차고 있는 심리적 미숙아라고 오해할지 모른다. 사실 재물과 명예의 기저귀를 차고 세상을 향해 보채는 기독교인들이 너무나 흔하지만, 이 또한 각자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스스로 책임질 일이다.
설령 어떤 위대한 과학자가 온 우주를 꿰뚫는 진리를 알았더라도 그의 ‘두뇌 컴퓨터’ 회로가 멈추는 순간 그 진리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사실은 그도 그런 종류의 진리가 사람의 인생에 별 의미를 더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과학주의자는 자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를 과학적으로 분석할 줄 모른다. 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며 마음속 깊이 그러한 자신에 대하여 분노한다. 역설적이게도 신이 없다는 그의 주장은 깊은 내면에서 미어져 나오는 신에 대한 갈망을 표현한다. 사람이라면 먼저 천국을 찾아 자신의 내면을 탐색해야만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자신을 알고 세상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신을 닮은 사람은 신의 아들이다. 그는 재물과 명예로부터 자유로이 독립하여 감각과 이성을 부린다. 천국은 이런 사람들이 사는 세계이다.
남충희 강원도 춘천시 칠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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