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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24 17:14 수정 : 2005.06.24 17:14

법원에 촉구한다. 이제라도 이 참혹한 신종 ‘심리’전을 그만두고 하루빨리 판결을 내려주시라. 노동자의 진실이 굴욕적으로 타협하고 짓밟힐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진실일 수 있도록, 법원 본연의 책무를 다하시라. 모름지기 법이란 낮은 곳으로 흘러야 하는 것이다.

김석진씨는 지난 1997년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너무나 당연한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해고된 뒤 8년째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가 제기한 소송의 1심과 2심에서 이미 해고가 부당하므로 김씨를 복직시키라는 판결이 났음에도 회사측이 2002년 2월에 상고한 이후 대법원이 석연찮은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고통의 세월이 무기한 연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과 권력이 장단을 맞춰 노동자들의 투쟁을 탄압해 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당장 이 순간에도, 전경의 군홧발과 날카로운 방패에, 언론의 썩어빠진 세 치 혀에, 갖은 회유와 기만적인 술책, 거짓 선전과 분열의 음모에 이 땅 민중들의 절규는 농락당하고 있다. 이에 더해, 법원은 ‘법’이라는 자신만이 독점하고 있는 육중한 힘과 준엄한 권위에 기대어 노동자의 목을 재판이라는 밧줄에 옭아매고 시간을 질질 끌어 끝내는 숨이 끊어지게 만드는 새로운 탄압방법을 개발해냈다.

법은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 되고 있다. 그 암담한 현실 앞에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제27조 제3항 따위는, 심지어 한국 최고의 법원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무시될 수 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도대체 이 땅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인가! 8년이라는 세월은 월급으로 살아가는 노동자에겐 그 자체로 고문과도 같은 시간이다.

엉덩이가 무거운 법원 덕분에 김석진씨의 어머님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되고도 병원에도 못 간 채 돌아가셔야 했고, 김씨 본인도 180여일 동안의 철야노숙, 43일간의 단식, 또 혹한 속에서 연이은 1인 시위로 이젠 오래 서 있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부인이 화장품 외판원을 하면서 벌어들이는 60만원 정도의 수입으로는 순식간에 불어난 수천만원의 빚을 갚기는커녕 생계를 유지하기조차 빠듯한 형편이고 유치원생이던 두 딸은 법원이 안겨준 시련 속에 성숙하여 이젠 <전태일 평전>을 읽는 어엿한 중학생이 되었다.

법원 측에서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그 잘나 빠진 ‘심리’ 절차는 왜 이러한 구체적인 현실들은 심리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미 박제가 되어버린 법조문들은 왜 살아 뛰는 인간의 목소리는 담아내지 못하는 것인가! 이 얼마나 치떨리게 평화로운 잔인함이며, 침묵조차 질식시켜 버릴 고요한 폭력이란 말인가!

부당한 해고를 자행한 회사 측은 뻔뻔스럽게도 김씨에 대해 근거 없는 비방을 퍼뜨리고, 회사 경비대를 투입해 김씨를 무수히 구타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또 한편으로는 먹고살게 해줄 테니 투쟁을 멈추라 회유하고, 이젠 대법관 출신의 변호사까지 기용했다. 저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내세우는 ‘8년 무분규 전통’이란 것도 김씨와 같은 노동자들의 고통 위에 세워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어쩌면 이는 그리 놀라울 것도 없는 사실이다. 수십조원 규모의 부정을 저질러 인터폴에 의해 178개국에 수배되고도, 세계 곳곳을 누볐던 세상 넓고 할 일 많은 한 재벌 총수 역시 곧 풀려날 것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당 의장의 입에서 벌써 사면복권 이야기가 스멀스멀 피어나오고 있는 판국에 어느 누구도, 그가 법대로 실형을 살거나 수십조원의 추징금을 물어 곤궁하게 살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 사회의 뒤집힌 ‘상식’이다. 우리가 자라면서 보고 듣고 배웠던 ‘상식’이다. 그것을 체득하면 우리는 ‘철이 들었다’는 칭찬을 받는다.

왜 ‘상식’이란 이름은 이다지도 낯설고 욕되단 말인가. 법이 앞장서서 그것을 유린하고, 그것을 되찾고자 싸우는 김씨와 같은 이들은 바보가 되는 이 상황이 왜 ‘상식’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배우는 정의는 정녕 교과서 속에서나, 선배들의 위선 속에서나 존재하는 그런 것이란 말이던가!

2003년도, 2004년도 아닌 2005년 6월이 다 가고 있다. 법원에 촉구한다. 이제라도 이 참혹한 신종 ‘심리’전을 그만두고 하루빨리 판결을 내려주시라. 노동자의 진실이 굴욕적으로 타협해야만, 짓밟혀야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진실일 수 있도록, 법원 본연의 책무를 다하시라. 모름지기 법이란 낮은 곳으로 흘러야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대법원의 조속한 판결과 현대미포조선의 복직 조처를 촉구한다.

권보원/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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