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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1.19 21:02 수정 : 2010.11.19 21:02

지금 엄마는,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떨리는 순간을 맛보고 있을 네가 안쓰럽기만 하여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있다. 잠시 기도를 올리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차를 마시다가도 그저 다섯개의 선택지를 놓고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너의 모습이 떠올라 뭐든지 끝까지 다 못하고 큰 숨을 쉬면서 오늘을 보내고 있구나.

넌 이 순간을 위해 새벽에 일어나 어두운 길을 걸어 버스에 몸을 싣고 학교로 향했고, 교복 치마 엉덩이 부분이 반질반질해지고 다리가 퉁퉁 부어오르도록 의자에 온종일 앉아 있었지.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온 네 얼굴엔 밤의 그늘과 피곤함이 드리워져 늘 엄마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네가 시험장에 가고 난 후, 네 방에 들어와 보니 책상에 높이 쌓인 책마다 색색깔의 펜도 모자라 형광펜으로 덧칠을 하였고, 언제든지 다시 보기 위해 책과 노트의 곳곳마다 포스트잇으로 표시를 해놓기도 하였더구나. 열심히 산 흔적들 속에 네 얼굴이 겹쳐져서 엄마는 잠시 가슴이 먹먹했단다.

“오늘은 공부에서 해방되는 기쁜 날이다. 오늘은 일생의 평범한 어느 날 중 한 날이다. 오늘은 11월 마지막 모의고사 날이다. 오늘 시험으로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했던 이 수많은 말들은 내용은 하나인데 자꾸만 형식을 바꾸어서 표현한 것 같아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미안하구나. 오히려 수능 단 한번의 시험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고, 눈치 빠른 넌 이 부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 너에게 시비라도 걸어주면 한바탕 싸움이라도 하여 마음을 후련하게 비우고 싶다고 했지. 온 식구들이 너의 눈치만 볼 뿐 아무도 네게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이 없어 넌 끝내 마음을 못 비웠겠구나.

고3과 고3 엄마는 모든 것에 있어서 면죄부였지. 방에 여기저기 널려 있는 많은 문제집과 프린트물, 필기구, 머리끈, 머리띠, 여기저기 벗어놓은 스타킹, 침대 구석에 끼워 놓은 소설책, 의자에 걸쳐 놓은 교복, 책상 주변 사방 1m 안에 써 붙여놓은 경구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정시에 쏟아부을 때’, ‘넌 세상의 중심이며 꽃이다’, ‘최후의 승리자는 마지막에 웃는다’…. 사방에 널려 있는 고3의 필수품들은 다른 가족에게 많은 피해를 주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불편하면 오로지 피할 뿐이다. 고3 엄마 또한 마찬가지, 직장이나 친척들 간에 좀 어려운 일을 부탁하면 “우리 애가 고3이라서요, 내년에 하겠어요”라는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면죄부가 된다.

사랑하는 딸아! 이제 면죄부의 유효기간이 오늘로 종료되는구나. 너는 시험 보고 돌아오면 방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하면서 집안일 좀 도와주고, 엄마도 혹시 네게 집중할 수 없을까봐 미뤄두었던 일들, 가슴이 졸아드는 것 같아서 맘 놓고 못하던 것들 좀 해야겠다.

그런데 이게 뭐지? 네 가방 속에 늘 가지고 다녀서 잘 보지 못했던 수첩 하나를 오늘은 집에 두고 갔구나. 손때가 묻은 수첩을 열어보니 빼곡하게 적힌 하루의 일정들, 그리고 하나씩 지워나간 것은 네가 계획했던 것을 실천했다는 표시겠지. 참 많은 날들, 공부를 위해 이렇게 치밀하게 살아왔구나. 난 네가 최선을 다해서 사는 그 모습이 자랑스럽고 좋았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인생을 꼭 행복하게 살 거라고 믿는다. 성공과 행복은 꼭 같은 것은 아니다. 시험을 잘 봐서 좋은 대학에 가면 성공할 확률은 높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행복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 네가 돌아오면 “시험 잘 봤니?”라는 말 대신 널 꼭 안아주면서 그동안 애 많이 썼다고 말해줄게. 가슴속의 돌덩이를 내려놓고, 시험에 대한 아쉬움도 뒤로하고 엄마와 포옹하면 우리는 더없이 행복할 거야. 성공은 한참 기다려야 하고 다른 경쟁자들을 밟고 일어서야 하지만 행복은 이렇게 바로 우리 옆에 있단다.

예경순 고3 학부모·서울 서초구 반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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