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규제는 무자격자를 걸러내는
장치이지 진입장벽이 아니다
면허남발로 저질주류가 유통되면
소비자의 불신만 커질 수 있다
정부가 주류 산업의 신규 진입을 막는 각종 규제를 푼다고 한다. 최근 발표된 세제개편안을 보면 희석식 소주의 시설기준은 130㎘에서 25㎘로, 맥주는 1850㎘에서 100㎘로 대폭 낮춰진다. 이르면 내년부터 농민주와 민속주는 시설규제가 아예 없어질 전망이다.
정책의 취지는 일단 거창해 보인다. 경쟁 촉진을 통해 국내 주류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여보겠다는 것이다. 예컨대 술을 만들 수 있는 시설기준을 낮추면 중소업체의 진입으로 술의 종류가 훨씬 다양해지고, 소비자의 선택권이 넓어질 뿐 아니라 시장 참여자간의 품질경쟁으로 우리 술의 세계시장 진출 기회도 커질 것이라는 게 정부의 예상이다.
이같은 신자유주의식 규제 완화의 논리가 술 시장에도 통할까. 주류산업의 역사와 특성을 연구해온 사람으로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정책의 순기능보다는 역효과만 초래할 공산이 커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술은 자유방임으로 방치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닌다. 술은 가전제품이나 자동차와 달리 일반재화가 아니다. 소비 자체가 사회적 위해성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세계 모든 국가들에서 엄격한 제조, 유통, 판매규제를 통해 강력한 통제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글로벌 경쟁력 운운하지만 아마도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술 진흥에 나선 국가는 우리나라가 유일할 것이다. 서구에서 위스키나 와인, 맥주를 국가적 지원으로 육성했다는 소릴 들은 적이 없다. 서구의 명주들은 지역의 문화와 생활 속에 어우러져 성장해왔고 오랜 역사를 거치며 세계적인 술로 거듭났다. 정부의 지원정책 때문이 아니라 엄격한 규제와 품질관리 속에서 소비자에게 꾸준히 선택되며 적자생존했다. 제조업체들이 자본력, 품질력, 경영력을 보유하게 되었을 때 세계화가 가능했다.
정부의 논리대로 글로벌 주류업체를 육성하려면 군소기업 수를 늘릴 게 아니라 적정 수의 정예업체를 관리하는 게 오히려 논리적으로도 맞다. 신규 중소업체가 가격, 위생안전, 품질다양성 등의 측면에서 경쟁력을 갖기를 기대하는 건 난센스다.
주류업에 대한 시설기준은 무분별한 면허남발을 막고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무조건 규제를 푼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규제완화인지 묻고 싶다. 일본의 경우도 1994년 맥주면허 규제완화 이후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맥주 원료에서 농약이 검출되는 등 저질주류가 사회적 문제가 됐다. 염가경쟁이 심화되면서 군소 주류업체의 도산사태를 빚기도 했다. 규제완화 이후 신규 면허를 받은 중소 맥주업체 가운데 20~30%의 업체가 문을 닫았고, 남은 업체들도 절반이 부실상태다.
주류 규제는 무자격자를 걸러내는 장치이지 진입장벽이 아니다. 술의 종류가 다양해지면 소비자의 선택권이 넓어진다고 주장하지만 면허남발로 저질주류가 대거 유통되면 소비자의 불신만 커질 수 있다. 더구나 소비자들이 더 자주, 더 쉽게 접하게 될 대상이 다름 아닌 ‘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통사고와 자살, 질병 등 수많은 사회적 폐해의 진원지로 지목되는 바로 그 ‘술’ 말이다.
조성기 한국주류연구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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