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채’ 오용사례 대책을 세우고
건의문까지 작성한 적이 있다
‘채소’의 뿌리가 깊고 정통이다 채소에 대한 순우리말은 남새나 푸성귀이다. 그런데 김장철의 엄청난 무·배추 더미와 일년 내내 나오는 온갖 서양 채소들을 가리키는 데에는 이제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북한에서는 남새를 문화어(표준말)로 쓰고 있다. 중국에서 줄곧 소채를 쓰므로 조선과 일본도 따라 썼으나 조선은 1766년 농서에 채소가 처음 쓰인 뒤로 계속 쓰고 있다. 일본은 1946년 이후 야채를 쓰고 있다. 그런데 1980년대에 들어서자 야채가 한국에 파고들어 고급채소 느낌으로 채소를 짓밟고 있다. 이 현상은 집집마다 온종일 여닫는 국산 냉장고 속의 ‘야채’ 표기가 더욱 부추기고 있다. 조선의 학자들은 중국말 ‘수차이’ 또는 일본말 ‘소사이’의 한자표기인 ‘소채’를 즐겨 썼는데 홍만선도 <산림경제>(1715년 추정)에 소채를 썼다. 50여년 뒤 1766년 유중림은 <증보산림경제>(산림경제의 증보본)에서 ‘채소’로 썼다. 최한기도 <농정회요>(1830년께 추정)에서 채소를 쓰고 있다. 유중림이 과감하게 소채를 뒤집어 채소로 쓴 까닭은 나물 ‘소’보다는 나물 ‘채’가 우리에게 보다 친숙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1962년에 농산종묘법으로 제정된 뒤 2008년 개정까지 이어지는 종자산업법에도 채소를 쓰고 있어 그 뿌리는 무려 244년에 이른다. 일본은 1946년 11월16일에 내각고시 32호로 상용한자 1850자를 제정했다. 이때 획수가 많은 ‘나물 소’자가 빠지게 되어 소채를 쓸 수 없게 되자 대신 ‘야사이’(야채로 표기)를 쓰기로 했다. 야채는 중국에서 식용 가능한 야생초본식물을 뜻하고 우리나라에서도 글자 그대로 들나물일 뿐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서울에 일본식 음식점이 늘어나고 드나드는 사람들은 일본식 한자말인 야채를 즐겨 쓰기 시작했다. 때마침 귀에 설익은 ‘야채요리’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여성잡지, 요리 강습회, 신문의 가정란, 방송 등에 야채라는 말이 넘쳐났다. 채소라는 말은 촌스러운 느낌을 주었고 젊은이들이나 배웠다는 사람이 쓸 말이 아니었다. 김치 재료인 무·배추만 채소이고 색깔이나 향기가 있는 잎채소, 열매채소, 뿌리채소는 모두 야채라고 여기는 이들도 생겼다. 1990년 가을 한국원예학회에서는 추계 총회에 앞서 야채 오용사례가 많아지는 점에 대한 대책회의를 가졌다. 이듬해 가을 총회 때 건의문까지 작성했다는데 현실을 생각하면 그 효과는 나타나지 않은 셈이다. 언제부터인지 국산 냉장고 안에 야채실이라 씌어 있고 김치냉장고 겉에도 야채·과일이 적혀 있다. 일본 수출용이 아니라면 채소실과 채소·과일로 바뀌어야 한다. 채소의 뿌리가 깊고 정통이기 때문이다. 김병연 퇴직교사·경기 고양시 풍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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