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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7.02 20:43 수정 : 2010.07.02 20:43

이제 우리 헤어지자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학교라는 소중한 곳에서
이젠 만나지 말았음 좋겠어

안녕, 학생 조회 널 처음 만난 게 벌써 20년도 더 지났구나.

너와의 인연을 되짚어 보니, 우린 정말 오래도록 만나왔더라구. 처음 만났던 때의 너는 내 기억 속 흐릿한 영상으로 남아 있지만 너와 함께 긴 시간을 보내던 작은 여자 아이가 빈혈로 쓰러졌던 기억이나, 고사리 같은 양손을 들어 나보다 키 작은 아이의 어깨를 잡던 기억이나, 오늘 줄 제대로 서지 않으면 널 하루 종일 만나게 될 거라는 선생님들의 호통소리는 웬일인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신기하게도.

오늘 아침, 뜨거운 햇빛 아래서 널 만나며 그동안 못 했던 이야기를 이제는 할 때가 아닌가 싶어서 이렇게 펜을 들었어. 이렇게 얘기해서 미안하지만 언제부턴가 난 너와의 이별을 꿈꿨어. 물론 내가 어릴 적에는 너와의 이별을 생각하지 못했어.

나의 삶 속에서 넌 언제나 주기적으로 만나는 친숙한 존재였거든. 혹시 기억나?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언젠가 방송으로 널 만났던 그때. 너무나 신기하고 어색해서 우리 둘 다 어쩔 줄 몰랐잖아. 그날 기억나니? 널 언제나 밖에서 만나는 걸로 알았는데.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어. 난 그 이후부터 언제나 텔레비전을 사이에 두고, 아늑한 교실에서 널 만나길 기다렸어. 근데 중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더 자주 널 만나게 되었지. 물론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운동장에서 말야.

내가 본격적으로 너와의 이별을 생각하게 된 건 아르오티시(ROTC) 훈련생으로 훈련소에 입소했던 그해 겨울이었던 것 같아. 그해는 정말 추웠어. 대학생이 아닌 군인으로 가는 첫발을 내디딘 겨울이었거든. 그래서 그랬는지도 몰라. 대학생이 되고 나니까 정말 널 만나기 힘들더라. 아주 가끔 학교 행사 때 너와 비슷한 아이를 만나긴 했지만 앞에서 누군가가 줄을 세우고, 인원을 파악하고, 간격을 좁혔다 넓혔다 하는 너와 비교하면 참 싱거운 아이들이었어.

그런데 그 훈련소에서 널 만나고 만 거야. 그것도 한겨울 새벽 6시에. 어떠니? 생각만 해도 몸이 오싹하고 으슬으슬한 게 그 시간이 좀 춥겠니? 훈련소 입소 이틀째, 어찌나 정신이 없던지. 점호를 하는데 글쎄 일어나서 옷 입고 모포와 매트리스를 개고, 입던 옷을 정리해 관물대에 넣고 전투화를 신고 모자를 쓰고. 아주 난리를 치는데 전투화 끈은 왜 그리 길던지. 끙끙 온 힘을 다했어. 난 늦었다는 고함소리와 우당탕 쓰러지고 헝클어지는 내무반을 뒤로하고 연병장으로 튀어 나갔어. 거기서 그만 널 만난 거야.

아직 날이 밝지 않아 어스름히 불을 밝힌 가로등 아래로 수많은 훈련병들이 꾸물대고 움직이더라구. 그러더니 어느 순간, 그러니까 그 넓은 연병장의 중앙 조회대에서부터 줄 세우는 소리가 들리고, 고함소리는 점차 커져 나가고, 나는 또 앞사람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줄을 맞추며…. 그렇게 그만 오랫동안 잊고 있던 널 만난 거지. 넌 학생 조회가 아닌 아침 점호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지만 나는 똑똑히 알고 있었어. 학생 조회와 아침 점호가 같은 아이라는 걸. 꾸물대던 인파가 점차 줄을 맞추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네가 아니고서야 볼 수 없던 장관이잖아. 그치?

그렇게 다시 만난 우리는 군대 생활 내내 함께 있었잖아. 너란 아이의 크기가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했지만 군대라는 곳은 정말 너와 잘 어울리던걸. 그런 군대 생활을 절반쯤 넘겼을 때가 돼서야, 나는 알게 됐어. 학생 조회라는 아이가 점호라는 이름으로 나를 따라 군대에 입대한 것이 아니라, 점호라는 군인이 제대하여 우리나라 수많은 학교에 학생 조회라는 이름의 예비군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이별을 생각했다. 이젠 안 만나도 될 것 같았어. 한번 방송이라는 울타리 안에, 텔레비전이라는 작은 상자에 들어간 널 바라보는 걸로 족했지. (아, 무슨 신파 삼류 가요 같아) 그런데 평생 학교라는 곳을 나의 직장, 내 일터로 삼은 나는 교사라는 계급장을 달고 학년, 반, 번호라는 계급장을 붙인 우리 아이들이 매달 한 번씩 널 만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말 그대로 그냥 지켜보고 있어. 아무것도 못 한 채. 기껏 할 수 있는 건 우리 아이들과 함께 쏟아지는 햇빛 아래 서 있다는 것 정도.

이제 우리 헤어지자. 넌 멀리서 볼 때가 가장 아름다울 뿐 아니라 원래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솔직히 다시 군대 가라는 말은 못 하겠다만, 여기 이 학교라는 소중한 곳에서 이젠 만나지 말았으면 좋겠어. 수천만원이 들어간 으리으리한 방송 시설 속에서 윙윙거리는 마이크 확성기가 아니라 또렷한 화면과 차분한 음성으로 만나자. 우리 아이들은, 이제 널 만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나나,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이 실컷 널 만났으니까.

오늘 아침 뜨거운 유월 햇살 아래서 너에게 이별을 고하는 편지를 쓴다.

안녕, 학생 조회야.

이성하 경기 화성시 반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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