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집마다 배달된 투표용지는 시를 기다리고 있는 하얀 원고지여야 한다. 시상의 단초를 얻을지 모른다.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은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우리가 정말로 한 편의 시를 원고지에 쓸 수 있느냐의 여부를 떠나서, “시적인 아름다움”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숭고한 어떤 것을 느낀다. 그 느낌은 각자 개인의 욕심이나 욕망을 넘어서 우리 모두를 사유할 수 있는 공감의 능력에 대한 것이다. 시는 물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유한계급의 전유물이거나 특별한 재능을 지닌 천재의 표현물이 아니다. 오히려 시는 다른 사람들의 아픔이나 고통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때 마음속에 깃드는 애가(哀歌)다. 이번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은 이창동 감독의 <시>는 아름답지만 고통스러운 영화다. 영화는 노년의 나이에 다다라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는 주인공 미자가 시를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거리의 어느 곳에서든 볼 수 있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는 타인의 고통을 발견하고 마침내 그 고통을 새로운 희망을 위한 희생 제의로 승화시키는 과정이다. 타인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므로, 이 사실에 대한 확인은 자기희생을 요구받는 순간이기도 하다. 과거에 대한 망각의 늪에 빠져드는 미자는 자기희생이라는 고통스러운 종교적 제의를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망각은 죽음이고 자기희생은 부활을 향한 믿음과 희망의 자원이다. 이렇게 보면 이 영화는 종교적 영화다. 이 영화는 동시에 정치적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노무현이라는 특정 정치인의 자기희생적 죽음을 떠올리게 해서다. 영화의 말미, 미자가 쓴 시 <아녜스의 노래>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부활의 아침, 아녜스 즉 순교자와 그를 추억하는 우리들이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순교자 같은 자기희생적 정신을 지니고 있을 때이다. 우리는 시와 정치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어휘들이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공동체가 좋은 삶,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요건으로 여겼다. 나아가 이 고대의 철학자는 생계에 바쁜 나머지 정치의 장에 참여하지 못하는 계층의 이해관계까지도 살필 줄 아는 정치만이 올바른 정치라고 생각했다. 정치가 곧 시였던 것이다. 정치는 시가 될 수 있다. 아니, 정치는 시여야 한다. 노무현을 다시 기억하자. 좌파 신자유주의자 노무현이 아니라 봉하로 내려가 농부로서 마을장터를 일구고 그곳에 민주주의 박물관을 세워 스스로 시가 되려 했던 노무현을 기억하자. 그 기억 속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반대하며 스스로 생명을 던진 허세욱을 다시 만나자. 순교자들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교수 채용 비리를 폭로하는 유서를 남긴 채 목숨을 끊은 시간강사 서정민씨와 4대강 사업을 반대하며 소신공양을 감행한 문수 스님을 기억하자. 자본의 노예들을 길러내는 대학을 거부한 김예슬과 입시교육 기관으로 전락한 정규고등학교의 교직을 내던진 이형빈 교사를 기억하자. 이들의 죽음과 희생에 우리가 응답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순교자들을 앞세웠다. 선거가 욕망의 정치를 실현하는 수단이 되어선 안 된다. 집집마다 배달된 투표용지는 시를 기다리는 하얀 원고지여야 한다. 시가 아니더라도 시상의 단초는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승렬 영남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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